4월 17일, 콜롬비아 출신 대문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가 타계했다. 88년의 생애 동안 그는 <백 년 동안의 고독>,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등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도 <백 년 동안의 고독(Cien Anos de Soledad)>은 198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남미를 넘어 세계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여겨진다. 본지는 송상기(문과대 서어서문학과) 교수의 글을 빌어 마르케스를 추모하며 그의 대표작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조명하고자 한다.

 지난 4월 17일 콜롬비아 출신의 중남미 문학의 대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중남미 문학사의 한 페이지가 아닌 한 장(章)을 정리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미 1967년에 출간된 그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더불어 가장 많이 읽히고 논의되는 그야말로 세계문학의 정전이 되었다. 본고에서는 이 작품의 의미를 살펴보며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자 한다.

▲ 자신의 책을 머리에 얹고 젊은 시절 마르케스의 익살스런 모습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내에는 그가 이전에 발표한 <마꼰도에 내리는 비를 보고 있는 이사벨>(1955),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1962), <불행한 시간>(1962),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1961) 등의 인물과 배경 그리고 사건이 양식화되어 녹아 들어가 있다. 그의 초기 작품세계의 총화라 할 수 있는 <백 년 동안의 고독>속의 인물들이 정형화되어 있다는 것은 그의 소설 쓰기의 궤적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마꼰도 가계의 대모(代母)인 우르술라가 집안 남자들의 두 이름인 호세 아르까디오와 아우렐리아노를 나누어 그들의 운명과 성격을 정형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물의 신화화이다. 이러한 인물상의 반복과 규칙은 과거가 미래에도 반복될 것이라는 순환론적 시간관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의 어린 시절의 정체성 바꾸기 장난과 성인이 되어서의 이들의 뒤바뀐 성격과 운명은 이들이 주고 난 후 서로 관이 뒤바뀜으로써 인물의 신화화는 긴장 속에서 재현된다. 

그는 예언을 앞질러 자기가 죽는 날과 그때의 모습을 살피기 위해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나 마지막 행을 읽을 것도 없이 그는 이미 그 방에서 나가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양피지의 해독을 마친 그 순간에 이 거울의 마을, 신기루의 마을은 바람에 날려갈 것이며,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또 백 년 동안의 고독으로 운명 지어진 이 집안의 가계는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므로, 거기 적혀 있는 모든 것은 과거와 미래를 가릴 것 없이 영원히 되풀이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홍신문화사, <백 년 동안의 고독>

 마꼰도(Macondo = macro거시 + mundo세계) 자체도

▲ 말년의 마르케스, 그는 노후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였다.
콜롬비아, 중남미 혹은 세계라는 역사의 강 속에서 어느 필터 속에 남겨진 침전물들의 재구성일지도 모르고, 마꼰도의 역사는 세계에 대한 ‘에붐’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꼬마 아우렐리아노는 얼음을 만지고는 뜨겁다는 외친다. 그의 아버지이자 마꼰도의 창시자인 호세 아르까디오는 얼음을 지구상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보고 벽이 거울로 된 집들의 도시의 꿈을 꾼 마꼰도 창건의 의미를 깨닫는다. 마꼰도는 근친상간의 죄의식을 피해 도망친 호세 아르까디오의 새로운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과 계획으로 이루어진 도시이다. 거울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것은 곧 이러한 선구적 계획과 직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마을의 운명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선입관으로 이루어진 즉자적 외부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거울은 단순한 반영 내지 호세 아르까디오가 바랬던 대로 증식의 이미지가 아닌 운명으로부터의 탈출 불가능성 혹은 종말론적 계시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다. 

 텍스트 속의 창조와 종말이라는 대칭적인 두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텍스트 말미의 시간은 철저히 급박하고 종말로 치닫는 카이로스 시간이다. 마꼰도의 파멸이라는 목적론적 시간을 완결하기 위해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허둥대며 멜끼아데스의 양피지 원고를 읽어 나가고 심지어는 열한 쪽을 뛰어넘기까지 한다. 이렇게 긴박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예언은 성취되고 그 어떤 순환의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역사는 종결된다. 시간이 화자를 억누를수록 이야기의 종결과 역사폭로의 관계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고조된다. 개인 즉, 화자의 죽음과 세상의 종말이 일치하기 때문에 화자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공동체의 종말의 비전을 균형 잡히게 보아야 한다. 여기서 계시자는 독자이면서 작가이다. 자신의 해석 속에서 신의 계시와 역사의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아우렐리아노와 바빌로니아는 그러한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려 필사적으로 애를 쓰지만 결국 두려움 속에 정확한 예지와 직관적인 시간 속이 아닌 두려움과 화자가 아닌 인물로서 운명에 굴하게 되는 카이로스 시간 속에 자신을 맡긴다. 이러한 천사와 신의 시간의 병존하면서 이 텍스트의 시간구도는 돼지꼬리처럼 나선적 시간형태를 지니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나, 영원히 반복되지는 않는 그러한 묵시록적 시간이다.

▲ <백 년 동안의 고독>의 가계도. 그러나 인물들의 관계도는 중요하지 않다.
 이 텍스트의 인물 중 화자일 수 있는 인물은 둘이 있다. 양피지의 작가 멜끼아데스와 바르셀로나로 건너가 작가를 꿈꾸는 가브리엘 마르께스(작가 자신의 유아론적 인물) 중 그 어느 누구도 화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멜끼아데스가 사건의 시간과는 초월한 차원에서 글을 쓰는 작가가 된다면 바빌로니아는 그것을 해독하는 독자가 된다. 그런데 바빌로니아는 멜끼아데스와 달리 사건의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멜끼아데스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는 종말을 초월한 초시간적 관점에서 모든 문명의 이야기를 탐색하고 있다. 양피지는 인도아랍어의 기원인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져 있다. 불투명한 미래가 그들에게는 조직화된 과거가 된다.

 멜키아데스가 남기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의 역사에 있어서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에서 잃어버리고 싶은 기억과 위선적 망각, 즉 역사를 지워버리는 권력의 메카니즘을 가장 극적으로 재현하는 사건은 바로 바나나 농장직원들의 파업과 이에 대한 진압이다. 아무도 수천 명의 노동자들의 시체를 태운 기차가 태평양에 유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의 절규는 은폐되고 만다. 바나나 농장의 주인 브라운씨는 노조와 협정을 서명하는 날을 비가 개는 날로 고시(告示)하지만 일주일간 비는 멈추지 않고 외견상 표면적 갈등은 해결된 것처럼 대중매체들이 떠들어대는 사이 노조 지도자들은 하나 둘 소리없이 처형된다. 마지막 남은 지도자인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를 체포하기 위해 군인들이 부엔디아 집안의 집을 들이닥쳤을 때 그를 구원한 것은 멜끼아데스의 방이 가지고 있던 신비스런 기운이었다. 멜끼아데스는 대학살의 참변이 영원히 망각의 늪으로 빠지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살과 더불어 노아의 홍수를 방불케 하는 4년 11개월 동안의 홍수는 서구 과학기술과 자본의 유입과 더불어 번창했던 마꼰도를 쇠락하게 하는 전환점이 된다.

"책꽂이에 '백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 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불면증에 대한 유일한 치료방법은 글자이다. 그러나 글자의 의미마저 잊게 되면 그 모든 세계에 대한 해석 자체가 붕괴될 것이다. 호세 아르까디오는 마꼰도의 존재가 문자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평생 동안 터득한 지식을 되돌릴 수 있는 기억장치를 고안하려 한다. 멜끼아데스가 마꼰도에 돌아와서 <백 년 동안의 고독>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호세 아르까디오가 이 기계와 씨름하고 있을 때이고 마꼰도를 휩쓸었던 죽음과도 같은 기억상실증을 물약으로 간단히 퇴치한다. 기실 물약보다도 잊혀질 위기에 처한 마꼰도의 역사를 담아내는 양피지 저술이 마꼰도의 역사를 이어가게끔 한 것이다.

 마꼰도의 역사는 고독의 역사이다. 근친상간으로 인한 저주로 시작해서 그 저주가 성취되는 순간 사라지는 모순과 소외의 역사이다. 구아히로 부족의 천년의 역사가 망각의 늪으로 사라졌다면 마꼰도의 백 년의 역사는 그 유기된 역사가 독해될 때 사라지질 운명에 처하는 역사이다. 바빌로니아 부엔디아가 독해를 마칠 때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자신을 담고 있는 콘텍스트가 텍스트와 함께 사라지게 되는 비초월적 존재의 초월적 독해만을 허용하는 역사이다.








송상기 본교 교수. 서어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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