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아서 학자마다 다른 방식으로 행복을 이야기하고 행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도 제각각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선뜻 대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행복의 의미와 행복한 사람의 모습은 불분명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 중의 하나인 자존감은 자기존중감(自己尊重感)의 약어로서, 자신의 가치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타인의 가치를 평가하듯 스스로의 가치도 평가하는데,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인가?’라는 자문(自問)에 스스로 자답(自答)하는 것이 바로 자존감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가치를 높임으로써 행복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현재 모습이 부족하고 빈약하다고 느끼고 보다 나은 자신의 모습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자신의 현재 상태를 개선할 수 있다고 인식하고 보다 높은 이상을 향해 부단히 노력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가치를 고양시키게 되고 이로써 행복에 이를 것으로 기대합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의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라는 명언은 자신의 현재 모습에 부족함을 느끼고 노력을 통해 현재의 상태를 개선시키고자 하는 이런 사람들의 태도를 잘 반영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런 사례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전쟁의 상흔과 빈곤의 고통을 이겨내고 눈부신 경제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분투했던 산업화 세대와 독재의 질곡과 권위의 폭력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정치적 발전을 성취하고자 노력했던 민주화 세대 역시 가치고양을 통해 행복을 추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듯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신장시킴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현실을 냉철히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한 후, 더 큰 목표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질주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외부의 평가 보다는 자신의 내적 평가에 따라 자존감을 유지함으로써 행복하고자 노력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내적 평가보다는 외부의 평가에 의지해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곤 합니다. 저명한 심리학자인 로저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중받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존중 받고 싶은 욕구는 비단 성인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에게도 있는데, 만 3세 아동이 보이는 많은 행동은 양육자인 부모의 존중을 얻기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한 예로 3세 아동이 커피포트 옆에 앉아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이는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뜨거운 커피가 담겨져 있는 주전자에 손을 대려고 합니다. 먼발치에서 이 광경을 본 아이의 엄마가 위험하니까 만지지 말라고 놀라서 소리쳤고, 아이는 깜짝 놀라 뒷걸음치며 다시는 그 커피포트에 손을 대려하지 않습니다. 왜 아이는 커피포트에 손을 대려하지 않는 것일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만약 실수로 포트를 엎지르게 되어 뜨거운 커피에 화상을 입게 되면 아픈 주사도 맞아야 하고 힘든 치료도 받아야 할지 모르며 더 불행하게는 성인이 될 때까지 흉한 흉터를 지닌 채 살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 커피포트에 손을 대려하지 않는 것이다’ 일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아이의 부모가 아이에게 뜨거운 커피포트의 위험성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할지라도 36개월 된 어린 아이가 뜨거운 커피포트를 만졌을 때 초래될 결과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인식 했을지는 사실 자신 있게 답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가 커피포트에 손을 대려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부모로부터 존중받고 싶어서 그랬을 수 있습니다. 즉 아이가 부모의 존중을 얻기 위해서 부모가 지시하는 행동에 순종한 것일 수 있습니다. 로저스는 ‘커피포트에 손을 대지 않는 행동’을 함으로써 부모의 존중을 얻는 아이의 행동을 ‘존중의 조건’이라고 부르고, ‘커피포트에 손을 대지 않는 행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존중을 ‘조건적 존중’이라고 칭했습니다. 이 이론에 비춰볼 때 아이는 커피포트에 손을 대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부모로부터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손 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른 것입니다. 존중받고 싶어서 커피포트에 손을 대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은 성인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직장을 구하려고 노력하고 부모님이 환영하는 배우자를 선택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은 부모의 존중을 얻기 위해 부모의 말에 따르는 아이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기를 갈망하고 사회가 부과한 존중의 조건들을 충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로저스는 우리가 행복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존중의 조건을 충족하는 데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진정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갖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 스스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태도를 지닌 사람들은 부모와 사회가 부과하는 외적 가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자기 스스로가 부여하는 내적 가치를 충족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합니다. 
 
 또 다른 유형의 사람들은 실패와 실수로 얼룩진 자신의 모습조차 포용하고 보듬어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때로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 절망감에 빠지곤 합니다. 또 사회와 외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의 내적 가치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때로 타인의 기준과 사회의 조건을 충족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최근 이론에 따르면 절망감과 자괴감에 빠진 나를 구해내어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자기친절(self kindness)’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친절은 실패와 상실을 경험한 자신을 가혹하게 비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불행을 거부하거나 부인하기보다 오히려 따뜻이 위로하는 태도를 일컫습니다. 살다보면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뜻하지 않게 실패나 상실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포츠 경기의 예를 들어보면, 가끔씩 발생하는 오심으로 인해 한 팀의 선수와 감독, 그리고 그 팀의 팬까지 쓰디쓴 패배를 맛보고 큰 상처를 받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하지만 오심도 경기의 일부이기 때문에, 설사 오심이 의심된다 해도 게임의 결과를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게 겪게 되는 실패와 상실은 성공과 성취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상처입니다. 하지만 스포츠 게임에서처럼 인생 역시 되돌려서 결과를 바꿀 수는 없으며 따라서 실패와 상실도 삶의 일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한 경기에서 패배한 사람에게 행복이란 없는 것일까요? 인생에서 패배를 경험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최근의 연구들은 가능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한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자기친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자존감이 손상되었을 때 우리는 자기친절을 통해 상처받은 자아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자기친절은 도달하지 못한 목표를 한스러워하고 이루지 못한 성취를 아쉬워하는 대신 마치 외손자의 아픈 배를 쓰다듬는 외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처럼 목표 달성에 실패한 자신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존감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세 가지 유형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중 지금 어떤 모습에 가깝습니까?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은 세상의 가치를 넘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실패와 실수로 실망한 자기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든지 모두 가치 있으며 의미 있는 인생으로 향해가는 행로임에는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세 가지 방법 모두 자존감을 통해서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의미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임영진
대구대 교수·심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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