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너브라더스, 20세기 폭스 등 미국 주요 방송사가 국내 법무법인을 선임해 자사 영상물의 한글자막을 제작·배포한 네티즌 15명을 고소했다. 이에 서울 서부경찰서는 6월 20일 피고소인 15명을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입건했다. 저작권법 136조에 의해 영상물의 자막은 2차적 저작물에 해당해, 원 저작자의 동의 없이 유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카페에 자막을 대량 배포한 혐의로 고소당한 김 모(남·36) 씨는 “아마추어 번역가들이 취미로 만든 것일 뿐인데, 이번 사건을 고소로 해결하려는 게 아쉽다”며 “단속이 목적이라면 해당 자막을 상업적 용도로 영상과 끼워 파는 P2P업체가 그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드라마(미드)의 주 소비층인 대학생들은 이번 사건을 어떻게 생각할까. 오랜 시간 형성된 문화를 이제야 규제하려는 것에 의구심이 든다는 입장과 애초에 불법이므로 당연한 조치라는 입장이 양립하고 있다.

▲ 사진출처 | 슈퍼내추럴 공식 페이스북


  고소에 부정적인 의견 많아
  주로 미드를 수용하는 층인 대학생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예전부터 미드 시장이 형성돼 왔는데, 여지껏 묵인해오다 이제야 자막에 대해 고소를 진행한다는 이유에서다. 미드를 즐겨본다는 이혜수(한국외대 국제학부12) 씨는 “왜 이제야 고소를 진행했는지 의문이 들었다”며 “우리나라에 미드가 널리 퍼지고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자막 제작자들에게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남희섭 사단법인 오픈넷 이사는 “미국 방송사가 한국시장 진출을 준비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미국에서 저작권 침해를 형사소송으로 대응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 이번 고소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며 “국내 법무법인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주도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실제로 영상물을 배포한 사람이 아닌 자막 제작자를 형사고소한 사례는 전세계적으로 매우 드물다. 2007년 폴란드에서 무단으로 자막을 제작해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배포자가 경찰 조사를 받은 사례가 있지만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남 이사는 “이번 일은 형사처벌까지 갈 사안이 아니라고 본다”며 “형사처벌을 위해선 현저한 사회적 법익의 침해가 있어야하지만 자막제작이 미드 시장의 성장과 파생문화 확대에 기여한 바가 있으므로 형사처벌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자막 제작이 대부분 상업적 목적 없이 재능기부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도 제작자들이 고소당한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피고소인들은 상업적 목적과는 상관없이 원저작자의 저작권을 침해했으므로 저작권법 제136조 1항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처벌수위 결정 시에는 나이, 영리목적, 습벽 여부 등의 사안도 고려된다. 만약 이들의 자막 제작이 영리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면 이는 감경사유가 될 수 있다. 안효질(법과대 법학과) 교수는 "형이 감경된다면 벌금형에 그치거나, 한국저작권위원회의 저작권 관련 교육을 받은 자에 대해 기소를 유예하는 제도인 ‘저작권교육조건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차이나는 배급 속도
  이번 고소가 자막의 배급 속도와 품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있다. 자막 제작자들은 현지 드라마 상영이 끝난 후 반나절 내에 자막을 만들어낸다. 이는 미드의 높은 수요에 영향을 끼친다. 김도연(중앙대 연극영화학12) 씨는 “우리나라에 미드가 처음 들어오기 시작했을 무렵 케이블 방송사의 방영속도는 한 시즌이 끝나야 런칭할 정도로 속도가 느렸다”며 “지금이야 케이블 방송과 현지방송이 서너 에피소드 정도의 차이가 나지만 이런 속도의 차이가 사람들을 인터넷에서 미드를 보도록 만든 것 같다”고 말했다. 강명선(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13) 씨 또한 “마니아층을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드라마가 종영한지 6개월 뒤에야 나오는 DVD를 누가 살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품질에 관해서 강 씨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자막 중 의학물이나 범죄물에 나오는 전문용어를 잘 번역해놓은 자막이 꽤 많았다”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자막 제작자들이 사라지면 대중적 수요에 의해 소수가 시청하는 드라마는 사양될 가능성도 높다. 김 씨는 방영되는 미드는 인기물에 한정된 점을 꼽으며 “케이블에서는 소수가 보는 미드가 있는지도 모를 것이고 안다 하더라도 돈 주고 사올 것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불법인 것은 변하지 않아
  적지 않은 학생들은 이번 사건을 ‘올 것이 왔다’고 여긴다. 전하연(이화여대 특수교육학13) 씨는 “일본어 자막을 배포해 우리나라 드라마를 무료로 보게 하면 당연히 안 되지 않겠냐”며 “자막 배포 자체가 불법으로 영상을 다운로드해 보라고 부추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취미로 직접 자막을 만든다는 배주호(인하대 아태물류학12) 씨 또한 “자막 제작자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든 매체의 직접적인 소비자가 아니며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저작권을 침해하는 범법자일 뿐”이라며 “이번 사건은 지금껏 묵과해 온 저작권 침해라는 ‘도둑질’에 칼을 댄 것”이라고 말했다.

  해결책이 있다면
  안효질 교수는 과한 저작권법의 형량을 지적하며 저작자와 이용자 모두의 양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안 교수는 “저작자와 이용자 모두가 한 발씩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이용자가 생각하는 효용가치와 저작권자가 책정한 비용 사이에 괴리가 있다면 그 시장은 실패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과도한 권리 보호는 자칫하면 불법시장을 더 키우는 결과를 야기해 권리자는 시장이 실패하지 않도록 적절한 한도 내에서 권리를 행사하는 지혜가 필요하고 이용자는 권리자가 정한 비용이 너무 과하지 않다면 그 안에서 저작권을 존중하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안 교수는 “적법하게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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