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지훈 일병(정경대 경제12)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공군본부는 김지훈 일병이 재심의를 통해 순직 의결된 바 분당추모공원에 안치된 김 일병의 유골을 현충원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했다. 공군본부 인사참모부는 8월 12일 열린 전공사망 재심의를 통해 8월 14일 김지훈 일병의 순직을 결정함으로써 기존의 일반 사망 판정을 번복했다.

  8개월 전 일반 사망 판정 당시 유가족들은 이에 반발해 국방부에 정보공개를 요구했다. 18일 후 받아본 사건당시 군 수사관의 수사 자료에는 사건 관계자들의 진술조서가 담겨있었다. 자료엔 김 일병이 공군 제 15특수임무비행단 단본부에 배속된 2013년 5월 20일부터 사망 당일인 7월 1일까지 1개월간의 행적이 기록돼 있었다. 공군이 수사 규정을 들어 공개하지 않던 김 일병 사망사건의 내막이 이 때 처음으로 외부에 밝혀졌다. 김 일병이 사망한지 282일 째 되는 날이었다.

   김지훈 일병은 단본부에 처음 배속된 지 이틀 후부터 사망 당일 까지 부관인 H중위에게 ‘거의 매일’ 질책을 받았다. H중위는 김 일병이 업무에서 실수를 할 때마다 이를 질책했고 2~3일에 한번 씩 잘못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변 선임들의 만류도 있었으나 H중위의 질책은 갈수록 심해졌다. K상병 2회차 진술조서 : ‘지훈이가 외울 것을 외우지 못하고 업무에서 실수를 할 때마다 H중위의 질책이 이어졌다’, ‘배속된 직후부터 사망 당일 까지 거의 매일 혼나다시피 하였다’

  2013년 6월 22일 김지훈 일병이 H중위의 연락을 받지 못해 30분 늦게 출근 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H중위는 김 일병이 머무는 생활관 당직근무자에게 ‘행사시간이 변경 돼 김 일병을 일찍 출근시켜 달라’는 전화를 했지만 김 일병은 아침식사를 하고 있어 전달받지 못했다. H중위는 김 일병이 늦게 출근해 단장 수행을 하지 못하게 된 것에 책임을 물었다. H중위는 김 일병에게 완전군장을 지시한 후 방독면과 탄띠를 착용한 채로 연병장 10바퀴와 피티체조 30회, 팔굽혀펴기 5회를 시켰다. 

  사흘 뒤인 25일 H중위는 김 일병에게 단장에게 줄 선물을 운전병에게 전달할 것을 부탁했지만 김 일병은 선물을 운전병에게 전달하지 못했다. 당시 부관실에는 김 일병이 선물을 옆에 두고 업무를 보고 있었고 운전병이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다. 다음날 김 일병이 운전병을 본 기억이 없다고 말하자 H중위는 거짓말을 한다며 다시 한 번 완전군장 구보를 명령했다. 이 때 부관실에 놀러온 예비역 남 모 씨는 김 일병이 완전군장을 가지러 가는 모습을 보고 부관에게 김 일병과의 면담을 자청했다. 면담 후 남 모 씨는 김 일병이 실수로 인한 자괴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 증세를 보인다고 판단해 항공의무대대를 통해 진료예약 (국군수도병원 신경정신과, 7월 3일 예약)을 도왔다.

  6월 30일 중국 국빈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대통령이 부대 행사장에 15분 일찍 도착한다는 사실을 H중위가 단장에게 전달하지 못해 단장이 행사장에 늦는 사건이 일어났다. 행사 전 H중위는 단장의 행사복 단추를 바느질 하다가 행사시간이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H중위는 행사를 마치고 부관실 병사(김지훈 일병, K상병, 운전병)들을 불러 ‘최근 부관실이 기본임무 수행이 제대로 되지 않고, 단합이 잘 되지 않는다’며 병사들 모두에게 방독면을 착용하고 완전군장한 채로 연병장 10바퀴를 돌게 했다. 김 일병에게는 추가로 2바퀴를 명령했다. H중위는 김 일병에게 잘못을 자백하라고 말하며 ‘거짓말을 했다’는 대답을 할 때까지 추가로 구보를 명령하기도 했다. 이튿날인 7월 1일 새벽, 김 일병은 6쪽 분량의 쪽지에 ‘부관(H중위)에게 얘기를 한번 해봤는데 그게 잘 안됐다. 머릿속이 하얗다’는 등의 내용을 메모로 남기고 생활관 계단 난간에서 목을 메어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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