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1월엔 대학생 형, 누나들이 죽었고 4월엔 고등학생 형, 누나들이 죽었잖아. 다음은 우리 차례가 아닐까?” 3일째 국민 단식에 참여하고 있는 이해지(여·21) 씨의 동생이 어느 날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너무나도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 말을 하는데… 가족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단식을 시작했어요.” 단식을 한 이유를 설명하는 이해지 씨의 표정은 굳건했다.
  故 김유민 학생의 아버지 김영오 씨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40여 일간 단식했다. 그가 쓰러진 다음 날인 8월 23일, 많은 사람이 세월호 참사 국민 단식장을 찾은 하루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서명해주세요!” “서명하시고 세월호 포스터 받아가세요!”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의 목소리가 광화문 사거리에 퍼졌다. 국민 단식장 스태프를 자처한 시민 단체 회원들이 사람들에게 노란 리본과 풍선을 나눠주고 있었다. 주말을 맞아 가족과 함께 광장을 찾은 아이들은 ‘안전한 나라에서 살고 싶어요’라고 적힌 노란 풍선을 하나씩 받아들었다. 1인 시위 참가자 중에는 앳돼 보이는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송승인(여·15) 학생과 조혜련(여·15) 학생은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어 양평에서 왔다고 했다. 광화문 광장에 오는데 부모의 반대는 없었냐는 질문에 그들은 손사래 치며 대답했다. “전혀요. 옳은 일이라 생각하시기에 적극 지지해주셨어요.”

  단식장 안은 서명장 앞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단식장 양쪽 흰색 천막 안에는 연극인 모임, 종교인 금식 기도단 등 다양한 단체가 시민들에게 나눠줄 노란 리본을 만들고 있었다. 가장 안쪽 김영오 씨의 천막은 ‘당분간 출입을 금합니다’는 문구와 함께 닫혀있었다. 그 중 한 가운데, 검은 차광막으로 햇빛을 가려놓은 국민 단식장이 있었다. 70여 명의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 국민단식 ~일째’라 쓰인 종이를 배와 등에 달고

사진 | 김민지 기자 minimin@kunews.ac.kr
앉아있었다. 참가자들의 한 손에는 생수가, 다른 한 손에는 소금이 담긴 컵이 있었다. 검은 차광막이 무색하게도 참가자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렀다.

  그들은 조용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혼자 앉아 책이나 신문을 읽거나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단식장에는 가족단위의 참가자들도 많았다. 안산에서 온 김미숙(여·43) 씨는 남편과 딸과 함께 단식 중이라고 했다. “세월호 특별법 없이는 앞으로도 같은 사고가 반복될 것 같아요. 그러면 우리 가족들도 안전하지 못하잖아요.” 옆에 있던 딸에게 이곳에 온 이유를 묻자 똘망똘망한 눈으로 대답했다. “제가 살아갈 미래잖아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후가 되자 단식 참가자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한층 굵어졌다. 자원 봉사자들은 아이스박스에서 물을 꺼내 단식 참가자들에게 나눠줬다. 더위에 지쳐 얼굴에 모자를 덮고 낮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 서명장 앞이 시끌벅적해졌다. 확성기 소리는 단식장과 서명장이 있던 곳의 바로 대각선, 일민미술관 앞에서 시작됐다. 김영오 씨에 대한 소문의 진상규명을 주장하는 대한민국 어버이연합의 집회였다. 어버이연합 측의 일부가 길을 건너 세월호 단식장 쪽을 향하면서 경찰과 충돌이 시작됐다. 1인 시위를 하던 참가자들과도 몸싸움이 빚어졌다. “빨갱이 놈들이 세월호 빌미로 나라 흔드는 거 아녀, 이젠 앞으로 나아가야제!” “잊지 말자고,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자고 이러는 거잖아요!” 어버이연합 회원들과 1인 시위 참가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그 시각에도 단식장은 차분했다. 대부분의 참가자는 단식장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묵묵히 유인물을 접고 리본을 만들고 책을 읽었다.
오후 5시, 세월호 특별법 촉구를 위한 범국민대회가 시작됐다. 단식장에 있던 시민들이 모두 집회장으로 이동했다. ‘대통령이 책임져라’,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문구를 든 500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맨 앞줄에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앉아있었다. 故 김지연 학생 어머님의 말씀을 시작으로 범국민대회는 1시간가량 계속됐다. 집회가 끝날 때쯤 상당수의 시민들이 다시 단식장으로 돌아왔다. 집회 후 시위대는 유가족들이 있는 청운동 사무소로 이동한다고 했다. 

  다시 집회장. 경찰은 경찰버스를 동원해 순식간에 광화문 광장 일대를 봉쇄했다. 집회 선두에서는 젊은이들이 경찰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경찰의 채증 카메라와 방송국 카메라가 뒤섞였다. 경찰과 집회 참가자, 일반 시민들이 한데 어우러져 몸싸움을 벌였다. 곳곳에 욕설과 고성이 오갔다. 순간 한 남성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다 튕겨져나가 차에 머리를 부딪쳤다. 더욱 언성이 높아졌다. 몸싸움을 벌인 경찰을 향해 “저 새끼 잡아! 얼굴 찍어!”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1시간이 흘렀다. 팽팽한 긴장상태가 지나고 대치하던 참가자들이 대부분 해산했다. 일부는 흩어져 청운동 사무소 앞으로 향했고 일부는 다시 단식장으로 모였다. 늦은 시각에도 여전히 단식에 동참하는 시민은 많았다. 23일 하루, 1일 국민단식 참가자는 700여 명이었다.

  언론에선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된 여야 갈등문제와 국정 마비에 대한 소식이 보도됐다. 유가족이 요구하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사법체계를 흔드느냐 아니냐에 관한 논쟁이 끊임없이 지속됐다. 세월호 참사 국민 단식에 참여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보단 가족을 먼저 생각했다. 그들이 하는 얘기는 한결같았다. “가족이 안전했으면 좋겠어요.”, “진실을 알고 싶어요.”, “부모로서 이번 사건만은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그들은 그렇게 검은 차광막 아래서 짧게는 하루, 길게는 45일 동안 단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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