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8 09:56 (금)
노후대비로 시작한 커피숍 '재건축' 이유로 1원도 못받아
노후대비로 시작한 커피숍 '재건축' 이유로 1원도 못받아
  • 김재훈 기자
  • 승인 2014.09.29 1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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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강남대로에 위치한 카페 라떼킹(Latte King)을 운영하는 엄홍섭(중어중문학과 74학번) 사장은 건물 ‘재건축’을 이유로 개업한지 2년도 되지 않은 가게를 비워야한다. 퇴직금과 60년 평생 모은 돈, 그리고 은행 빚을 가지고 시작한 사업이지만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도 없다. 엄 사장은 임차인들이 합법적이지만 부당하게 내쫓기는 이 현실이 남의 나라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했다. “홍대 근처, 신사동 가로수길 등에도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모두들 이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어요.”

 노후대비를 위한 결정
  엄 사장은 그의 나이 55세가 되던 2010년, 대기업 이사직에서 정년퇴직했다. 평생 살림하며 아이를 키우던 아내는 종종 커피숍을 하고 싶다고 말해왔다. 그간 커피숍을 운영해보고 싶던 엄 사장이었지만 퇴직 후에 막상 무언가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아 우선 독서실을 다녔다. 엄 사장의 아내는 매일 독서실을 오가며 남편을 보채 서울 시내 부동산을 찾아다녔다. 그럴 듯한 가게가 나오면 부부는 평일과 휴일 그리고 점심, 저녁 시간에 골목에 서서 사람들의 통행량을 살폈다. 다리가 아프면 근처 카페에 앉아 길거리를 내다보기도 했다.

  여러 요소들을 검토하던 중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강남역 이면 도로에 위치한 3층 상가 건물이었다. 매장의 면적은 기대보다 작았지만 밖에서 차를 마실 수 있는 테라스가 있었다. 10평 면적에 권리금만 1억 6200만원이란 큰 금액이었지만 엄 사장은 용기를 내 과감히 그곳을 선택했다. 그는 인테리어, 시설비, 체인 본사 지급금 등 2억 8000만원의 초기자금을 투자했다. 퇴직금과 그간 저축한 돈에 은행에서 대출한 돈을 더했다.

 2011년 7월 첫 계약
  60대 중반 여성으로 부동산 중개업소를 운영하는 건물주 대리인이자 관리인은 임대계약을 할 때 화해조서를 쓸 것을 요구했다. 화해조서는 재판 받을 권리를 포기하는 일종의 각서이다. 엄 사장은 망설였다. 당시를 회상하며 엄 사장은 말했다. “건물주 대리인은 ‘(화해조서는) 여기 가게 10개 모두 쓰는 거예요. 재건축 걱정하지 마시고 5년, 10년 장사하고 월세나 제대로 내요’라고 말했죠.”

  엄 사장이 건물주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분명 존재하지만 그를 직접 마주할 일은 없었다. 엄 사장은 “건물주 대리인이라는 그녀는 가끔 불쑥 가게에 나타나 ‘사장님! 아메리카노 한 잔!’이라 외칠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때마다 엄 사장의 아내는 대리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얼른 커피를 뽑았다.

 1년 후 재계약
  가게 오픈 1년 후 재계약을 하기 위해 건물주 대리인이 가게에 들어왔다. 엄 사장은 “당시 대리인은 ‘회장님께서 임대료 올리라고 하셨지만 내가 중간에서 임대료를 동결했어’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곧 대리인은 엄 사장에게 간비를 요구했다.

  당시 엄 사장은 간비가 곧 거간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거간비란 사고파는 사이에 들어 흥정을 붙인 데 대한 비용이다. “얼마 줘야 해?”라고 묻는 아내에게 엄 사장은 “10만 원 정도면 충분치 않을까”라고 답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엄 사장의 아내는 대리인에게 간비로 30만원을 줬다고 했다. 생각보다 더 주었지만 엄 사장은 임대료가 오르는 것보다는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10개 상가 모두 재계약 후 건물 내 임대료가 오르지 않았지만, 건물 내 다른 가게들은 모두 50만원을 대리인에게 지불했다.

재계약 3개월 후
  건물주 대리인이 어느 날 갑자기 엄 사장에게 건물을 재건축할 것 같으니 빨리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빠지라고 통보했다. 하늘이 노랬다. 구청에 확인해보니 재건축신고 들어온 것이 없다고 했다. 건물주 대리인이 권리금 수수료를 노리는 수작이라는 생각이 들어 엄 사장은 건물주 대리인의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8개월 후인 2013년 6월, 장사를 시작한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엄 사장은 ‘재건축한다. 한 달 말미를 줄 테니 나가라’는 건물주의 통보를 받았다.

그 후 1년
  엄 사장은 다음 임차인에게 가게를 넘길 때 받는 돈인 권리금을 되찾을 수 없게 됐다. ‘재건축’을 이유로 가게를 비우라고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전 임차인에게 지불한 권리금 1억 6200만원과 인테리어, 시설비 등 총 2억 3000만원을 허공에 날리는 셈이다. 엄 사장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건 마치 폭탄돌리기와 똑같죠. 임차인끼리 권리금이란 폭탄을 돌리다가 ‘재건축’을 이유로 그 폭탄이 터지면 주고받던 권리금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거에요.”

  건물주는 재건축 후 다음 임차인에게 권리금을 받을 수도 있고, 권리금 대신 매달 고액의 임대료를 받을 수도 있다. 이른바 ‘권리금 약탈’이다. 국내에선 이를 제재할 법적 근거가 없다. 영업 2년 만에 명도소송장을 받은 엄 사장에게 남은 것은 은행 빚 뿐이다. 아내는 카페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했다. 재건축을 이유로 쫓겨나면 힘들게 고생한 아내의 노고가 물거품이 된다. 고위 법관 출신 변호사도, 구청도 임차인 편은 아니었다. 합법이란 이름 아래 모두 건물주 편이었다.

  8월 21일 명도소송의 판결이 났다. 패소였다. 초기 계약 때 써둔 화해조서가 발목을 잡아 항소할 수도 없었다. 건물주는 강제집행을 신청했고 법원집행관은 9월 25일 이후에는 언제든 강제로 명도를 집행할 수 있다는 예고장을 발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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