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조세희 씨는 1970년대 그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에서 노동, 여성, 철거 문제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부조리들을 지적한 바 있다.


작가 조세희가 난쏘공 첫 작품 『뫼비우스의 띠』를 발표한지 약 30년이 지났다. 그러나 소설에서 보여진 문제들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반복되고 있다.


◇2002년 성북구 안암동
한봉문 씨는 안암동에 살기 시작한지 2년이 다 돼 간다. 부산에서 상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가 곧 철거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 뒤 전국 규모 철거민 단체의 공청회도 나가보고 서울시청, 성북구청에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 해 봤다. 그러나 아직 주민등록상의 주소가 부산으로 돼 있는 그에게는 안암동을 떠나는 길 밖에 없었다. 게다가 행정상 안암동 주민이 아닌 그는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용역 업체와 맞섰다. 용역과 싸우다 구치소 생활하고, 부상도 심심찮게 입었다. 그래도 그는 안암동 그만의 보금자리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는 오늘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용역 때문에 밤잠을 설쳐가며 매일 자정부터 오전 2시 반까지 철거지역 규찰을 돈다. 낮에는 용역들을 막기 위한 철조망과 구덩이를 파는 일을 한다. 자재를 살 경제적 여력이 없기 때문에, 사용되는 자재는 대부분의 경우 주어온 것들로 조달한다. 그래도 한 씨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다. 목수 일을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주민의 대부분은 생계도 포기한 채, 안암동 철거촌을 지키고 있다. 한 씨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규찰을 오전 7시까지 돈다. 안암동을 지키기 위해…. 그러나 아파트 시공업체와 무시무시한 용역업체가 계약한 철거 완료 시기는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닮고 또 다른
우리 땅에서 철거의 역사는 일제시대부터 시작됐다 한다. 당시 우리나라를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일제는 도로, 철도 등 각종 기간시설을 건설하며 주민들의 집을 강제 철거했다. 그 뒤 우리나라에 철거촌, 철거민이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경제 개발이 모든 논리를 압도했던 1960년대부터다.

그러나 1960∼1970년대의 철거와 현재의 철거는 약간 다른 양상을 보인다. 철거촌 문제를 발생시키는 주체의 변화가 그것이다.

1960년대 철거촌 문제를 만들고 철거민의 입을 다물게 했던 것은 바로 국가 이데올로기였다. 그 어떤 가치보다 국가의 발전과 안보가 우선시 됐던 사회에서 철거민들은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이호승 전국철거민협의회 중앙회장은 “1960년대의 국가이데올로기는 일반 국민들에겐 엄청난 힘을 갖고 있었다”며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땅과 가옥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포항제철. 당시 제철소 부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주민들은 실제 땅값의 반도 안되는 보상금만을 받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부당함을 말하지 못했을 만큼 당시의 국가 이데올로기는 고압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철거촌 문제는 60년대 그것과 다르다. 철거촌 문제의 경우에는 돈이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낮은 가격에 재개발 공사를 마치려는 기업의 노력은 철거촌의 문제를 야기하는 기본적 원인이 된다. 요즘 철거촌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철거 용역업체의 경우도 적은 비용으로 철거와 철거민 보상을 마치려는 자본 논리의 산물이다. 철거 용역은 계약 기간 내에 철거를 위해서 살인위협을 일삼고 여자들 앞에서 옷을 벗어버리는 등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전국철거민연합의 장석원 연사집행위원은 “철거 용역이 계약을 맺을 때 기간 내에 일을 마치지 못하면 위약금을 물게 돼 있다”며 자본이 용역을 고용해, 폭력을 낳는 구조를 설명했다. 요컨대, 오늘날 철거민 문제는 왜곡된 저비용 고효율 추구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그 안의 도덕성은 이미 파괴된지 오래다.

이렇게 1970년대 ‘난장이’와 2002년 ‘난장이’, 한봉문 씨는 닮았다, 그러나 다르다.

 
◇난장이들의 외침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달라진 것은 철거촌을 주도하는 논리뿐만이 아니다. 과거에 비해 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철거민들은 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의식이 부쩍 향상됐다. 그리고 요구사항도 당당히 말한다. 철거민들의 요구사항은 재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지낼 수 있는 가수용 단지와 임대 아파트다.


물론 철거민이 요구하는 가수용 단지와 임대 아파트는 철거민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주비, 생활보조금 명목으로 4인 가족 기준 400∼500만원을 받는 것이 전부”라며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남가좌동 철거촌 주민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철거민들의 요구사항은  그대로 실행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러한 저항 자체가 없었던 것에 비춰볼 때, 철거민들의 주거권 찾기 인식이 향상됐음을 알 수 있다.

◇제도는 우리 편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제도는 철거민의 편이 아니다. 현재 재개발관련법은 약 20여가지. 그러나 재개발관련법은 공통적으로 철거민보다 사업주체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이는 재개발관련법이 재개발의 시기와 장소를 사업주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 주어야 할 법 조항마저도 철거민의 편은 아니다. UN개발위원회에서 정한 1인당 최소 정주 공간은 3.5평.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 정주권은 헌법 등 우리나라의 법 조항 어디서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 우리 사회는 이 최소한의 공간조차 영위하지 못하고 있는 일부 소수에게 그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에필로그
철거민들이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올림픽을 이유로 서울과 수도권 일대에 대대적인 철거가 진행되면서다. 동떨어진 철거지역 간의 연대는 철거민들의 권익 찾기에 큰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 그러나 함께 보듬어주고 외부의 적에 대항해야 할 철거민 사이에서 반목과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9월호 『말』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서울 지역 철거촌이 속해있는 전국철거민연합(이하 전철연)은 요즘 소속된 일부 철거지역간의 갈등에 휩싸여 있다. 이미 많은 지역별 철거대책위원회는 전철연을 탈퇴한 상태다. 제도와 인식, 권력과 자본에 지칠대로 지친 철거민들은 다시 내부의 갈등이라는 짐마저 안게 됐다.


수 십년간 계속돼 온 철거민 문제의 반복. 내부의 갈등은 그 반복의 고리를 끊는 일을 더욱 요원하게 만들고 있다. ‘난장이’의 공은 아직까지 달나라에 닿지 못했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