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는 성낙수 외솔회 회장의 개회사로 시작됐다. 성낙수 회장은 “568년이 지난 지금도 세종 시대의 창의적이고 헌신적인 분들의 면모를 그리워하고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행복”이라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글이 말을 적는 것뿐만이 아니라, 각 분야와 온 누리로 퍼져나가고 쓰임이 넓어지는 가능성을 탐구해보는 데 이번 대회의 뜻이 있다”고 말했다.

 일상적 풍경 속의 한글
  최범 디자인평론가는 ‘한글의 시각적 풍경’을 주제로 한글의 시각적 화용론 방안에 대해 논했다. 최범 평론가는 “한글은 종이 위의 글자, 휴대폰 속의 단어만이 아니라 삶의 공간 여기저기에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며 “한글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 하나의 풍경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최범 평론가는 한글이 만드는 풍경의 확산?을 위해서 글자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다. 그는 “이제까지는 한글 연구가 주로 창제 원리, 구조, 특성, 운용에 관한 것이었다”며 “이제는 한글에 대한 시각적 연구, 즉 글꼴 연구에도 범위를 넓혀야한다”고 말했다.

▲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의 한글 간판거리. 외국어 간판이 즐비한 요즘, 한글 간판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사진 | 이예원 기자

  최범 평론가는 한글 풍경의 예시로 간판을 언급했다. 그는 “도시 공간 속 한글 풍경을 대표하는 것은 역시 각종 광고물”이라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간판”이라고 말했다. 간판이 도시 공간에서 가장 많은 한글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덧붙여 그는 “간판과 그에 새겨진 한글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이며 또 그 자체로서 한글 풍경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범 평론가는 이러한 가치에 비해 한국의 간판 풍경은 너무 어지럽고 그 간판을 가득 채운 한글의 표정도 아름답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문화 지체(cultural lag) 현상’이라 칭했다. 책을 비롯한 인쇄물의 디자인과 글꼴이 상당히 좋아진 것에 비하면, 공간 영역에서의 한글은 아직 낮은 수준에 머물러있다는 것이다.

  또한 최범 평론가는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서울시 좋은 간판상’에 대해 언급하며 “아름다운 한글 간판을 찾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여러 단계를 거쳐 최종 심사에 올라온 추천 간판 중에 세련돼 보이는 것은 대부분 영어로 표기됐다는 것이다. 그는 “현행 옥외광고물법에는 간판에 한글을 표기하도록 의무화돼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며 “한글 표기를 해도 영어가 주를 이루고 한글은 구석에 조그맣게 표시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마르크스가 ‘세계는 인간에게 펼쳐진 커다란 책’이라고 했다면 오늘날 도시공간이야말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책”이라며 “확대된 책으로서의 도시 공간 속에서 한글의 풍경을 잘 가꿔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글의 기계화가 필요한 때
  이어 신부용(한국과학기술원 IT융합연구소) 교수는 “한글의 기계화와 세계 문자화”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그는 “우리는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라고 자랑하지만, 이 자랑은 부끄러움을 동반한다”며 운을 뗐다. 자랑스러운 문자를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신부용 교수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것은 마치 세계 최대의 둑을 쌓아 인류가 넉넉히 쓸 양의 물을 담아 놓은 격”이라며 “수문을 열기만 하면 이 물을 풍부하게 쓸 수 있는데 우리는 그럴 생각은 안하고 저수지가 크다고 우리끼리 자랑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영화 'Her'의 한 장면. '테오도르'는 인공 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에게 점점 사랑을 느낀다. (사진출처 'Her'공식 촘페이지 www.herthemovie.com)

  신부용 교수는 한글이 가진 잠재력을 발휘할 방법으로 ‘한글의 기계화’를 제시하며, 그에 앞서 ‘문자의 기계화’에 대해 설명했다. 신 교수에 따르면 문자가 기계화된다는 것은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문자 덕분에 편하게 그리고 빨리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문자가 사람의 생각이나 말을 기록해주는 장치라면, ‘문자기계’는 우리의 생각이나 말을 글자로 나타내 준다. 더 나아가 그 생각이나 말을 타인에게 전해주기도 하고 적당한 방법으로 저장해 놓기도 한다. 신 교수는 얼마 전 개봉한 영화 ‘그녀(Her)’를 언급하며 이해를 도왔다. 그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문자기계와 사랑에 빠졌다가 그 기계가 자신뿐만 아니라 또 다른 외로운 사람 634명과 동시에 대화중이라는 답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고 말했다. 문자기계가 마치 진짜 사람과 소통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신부용 교수는 한글기계가 만들어진다면 화자가 언어에 상관없이 어떤 말을 하면 단순 소리로 받아들여 그것을 한글 코드로 전환시킬 거라고 설명했다. 지금의 문자기계가 각 언어별로 발음기호를 따로 만들어 고유의 모델을 만들어야하는 반면, 한글은 어떤 언어도 표기가 가능하므로 세계 공통의 발음코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이를 ‘녹음기의 기능’으로 비유했다. 그는 “마치 녹음기가 언어와 상관없이 소리를 기록하는 것처럼 한글도 소리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며 “다른 점이 있다면, 녹음기는 소리를 음파로 분석하고 한글기계는 소리를 한글로 분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부용 교수는 한글이 세계화를 꿈꾸면서도 이룩하지 못한 것은 한글을 기계화 할 수 있는 특성은 이미 구비돼있지만 이를 실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신 교수는 “한글기계, 즉 여러 나라 말을 그대로 한글로 받아 적고 이를 그 나라 문자로 표현해 주는 기계는 아직 세상에서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한 신기술”이라며 먼저 비교적 간단한 실용적 프로그램을 만들어 국민이 사용하는 것이 우선시돼야한다고 주장했다. 한글의 가장 큰 장기인 소리표기를 활용하는 응용프로그램을 많이 만들고 이를 수익기반으로 구축해 연구비로 재투자하자는 것이다. 신 교수는 “세계 최고 문화재의 가치를 지닌 한글은 우리의 수출상품 제1호가 돼야 할 것”이라며 “한글이 갖는 무한한 가치를 캐내 기술화 한다면 세계인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우리에게 문화적, 산업적 편익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글에 생명을 불어넣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엔 각 영역 간 탈장르화와 융합의 가속화가 기본 전제가 됐다. 노승관(한양대 디자인과) 교수는 “그 동안 대부분의 글자들이 인쇄매체라는 집에 담겨 독자를 만났고 그 중 가장 기본적인 형태가 종이였다면, 이젠 글자가 사는 가장 대중적인 집은 스크린”이라며 ‘한글과 애니메이션’을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다.

  노승관 교수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는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는 “흔히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아동을 위한 만화영화를 지칭하는 용어로 오해된다”며 “어원이 ‘생명을 불어넣다’는 데서 유래한 것처럼 단순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통해 어떤 의미 있는 생명(캐릭터)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승관 교수에 따르면 애니메이션의 하위 장르 중, 그래픽 이미지에 움직임을 부여한 것을 모션 그래픽이라 하며 이 중 특히 한글을 비롯한 문자에 움직임을 추가한 것을 무빙 타이포그래피라 지칭한다. 노승관 교수는 현재 한글 무빙 타이포그래피를 실제로 적용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의 무빙 타이포그래피 제작기법은 서양의 알파벳 중심으로 발전해 그 제작 양식을 다른 언어에 적용할 수 없다”며 “한글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글자 캐릭터 구성단계부터 한글의 제자원리와 애니메이션의 원리를 결합시키기 위한 시스템 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승관 교수는 한글 애니메이션 시스템 제작과정을 로코모션단계, 자모단계, 모아쓰기단계, 구성단계로 구분했다. 로코모션 단계는 움직임의 기본 규칙을 만드는 단계로 글꼴 고유의 성격에 해당하는 움직임 원칙을 지정하고 프로그래밍하는 단계다. 로코모션 단계에서 지정된 규칙을 바탕으로 자모단계에선 24개 자모 낱자를 제작한다.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을 제작하는데, 먼저 움직임의 기본 줄기가 되는 모음을 디자인하고, 자음 디자인을 추가한다. 이렇게 결합된 자모들을 통해 하나의 글자를 만들고 글자들을 모아 단어로 만드는 조음단계는 모아쓰기단계라고 말한다. 마지막 구성단계에서는 이렇게 조합된 단어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한다. 글자 크기에 변화를 주기도 하고 작품을 보게 될 관람객의 위치를 센서에서 입력받아 관람객 움직임의 속도에 반응해 글자 변화의 속도를 일치시키는 기능을 추가하기도 한다. 노승관 교수는 “한글디자인의 표현방식이 진화하고 있고, 건축물이나 실내외 디자인에도 한글이 많이 사용된다”며 “한글의 표현이 장식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고차원적 결합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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