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산업의 발전과 스마트폰의 등장은 인간이 장소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 가능한 사회적 환경인 ‘유비쿼터스’의 시대에 진입하도록 했다. 뇌 과학과 생물학은 인간의 이성과 세포 등 우리가 육안으로 인식하지 못하던 것까지도 연구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관념까지 흔들고 있다. 이처럼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변화를 겪으며 몇몇 학자들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결국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 얘기한다.

 과학과 분리된다는 것
  ‘과학기술 시대의 인문학’ 강연에서 김영식(서울대 동양사학과) 명예교수는 “애초에 자연세계와 과학

▲ 과학 혁명기의 대학교는 강력한 종교를 기반으로 세워져 새로운 사상을 논하는 장은 아니었으나, 여러 간접적인 방식으로 과학 혁명이 일어나도록 도왔다고 평가된다.

적 지식에 대한 탐구는 동양과 서양에서 인문학적 추구의 일부로 포함돼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서양에선 고대부터 르네상스까지 학자들이 자연세계나 과학을 자신의 지적 관심에 포함시켰다”며 “동양의 유학자도 경전에서 자연세계와 과학 지식에 대해 언급하는 구절들을 피하지 않고 자세히 공부했고, 그들에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늘의 뜻 즉, ‘천리(天理)’의 추구를 통해 성인에 이르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과학이 인문학과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16, 17세기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 일어난 이후였다. 이 시기에 갈릴레이, 뉴턴 등에 의해 고전역학이 확립됐고, 그에 따라 자연과 세계가 변혁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때 근대과학이 형성됐다. 근대과학은 수학과 인위적인 조작에 의한 실험적 탐구를 중시하기 시작한 새로운 과학의 모습이었다. 김 교수는 “근대과학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과학의 전문화가 진행됐고 전문적인 과학은 일반 학문, 특히 인문학과 점점 유리됐다”고 말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이 같은 유리 상태는 점점 심해지고 고착화되었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물리학자인 찰스 스노(Charles Percy Snow)는 이러한 상태를 자신의 저서 <두 문화와 과학혁명>에 제시하고 과학적 인식을 최고이자 유일한 인식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주의를 주장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과학과 인문학 양쪽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대립 상태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전통적 인문학자는 고전과 교양 위주 교육의 도덕적 우위를 선언하고 과학자의 전문성을 존중했다. 김 교수는 “인문학자의 존중이 결국 전문 과학지식을 과학자들에게만 맡기고 자신의 관심 대상에선 제외한 채 무시해버린 효과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과학기술이 야기한 여러 문제에 직면한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을 인문학으로 포용하고 이해하고 사용해야한다”며 “인문학자가 과학기술을 계속해서 관심대상에서 제외시킨다면 이것이 인문학의 위기”라고 말했다.

 과학 내 인문학적 성찰
  ‘
질주하는 과학기술 시대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주제로 열린 강연에서 김기봉(경기대 사학과) 교수는 “과학혁명 때의 패러다임을 계속 가져간다면 자연이 복수를 통해 인간이 파국을 맞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은 우리 삶의 진보를 가져왔으나 자연파괴라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지구온난화가 대표적이다. 지구온난화는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화석에너지 사용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기후 시스템에 변화가 일어난 예로 설명된다. 김 교수는 미국의 세계적인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말을 인용했다. 리프킨은 그의 저서 <공감의 시대>에서 “(인간은) 더 이상 지구를 쓰다버린 에너지로 채울 것이 아니라 동정과 아량으로 채워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김 교수는 “과학기술시대에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하다”며 그 이유로 ‘인류의 행복’을 꼽았다. 그는 “과학기술의 발달은 사이보그나 복제 인간과 같은 새로운 종의 인류를 만들어낼 것인데 이 시기에 과연 인간이 행복해질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Max Weber)도 톨스토이의 말을 인용해 근대 과학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막스베버는 그의 저서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과학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과학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어떤 답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인문학적 성찰을 시작하는 인간 의식의 원천은 ‘우리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3가지 물음이다”라며 “오늘날 인류 문명의 위기는 위의 3가지 물음을 망각하고 앞으로만 질주한 데서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는 이미 일어났던 사실이지만, 우리는 인류의 기원조차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며 “양자물리학이 힉스입자의 존재를 찾아내는 데 이미 거의 가까이 갔지만, 만물의 근원을 밝힌다 한들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과학기술에 응용되는 인문학
  ‘과학기술 생산시대의 인문학의 위기’ 강연에서 피터 갤리슨(Peter L Galison, 하버드대 과학사) 교수는 “과학기술에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실제 과학기술 분야의 핵심 분야에 인문학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대 과학기술시대에 새롭게 생겨나는 기술은 인간 입장에서 매우 생산적이고 흥미로운 것이나 한편으로는 위험한 창조”라며 “기술 발달에서 생겨나는 문제는 과학기술의 지식인 열전달 방정식, 대수 기하학 같은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핵폐기물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표시를 만드는데도 인문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갤리슨 교수는 프라이버시 문제를 예로 들었다. 2013년 6월,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 전 미국 국가안보국(NSA)요원은 페이스북과 구글 등 웹사이트들이 사람들의 비밀정보를 NSA에 공급해왔다고 말해 큰 파장을 불러왔다. 페이스북은 정보수집 논란과 함께 정보를 조작해 사람 감정의 유연성을 시험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갤리슨 교수는 “개인의 정보를 어디까지 수집할 것인가에 대한 것은 IT 전문가의 지식영역보다는 철학, 문학, 법 등의 영역과 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다”며 “프라이버시의 개념은 최소한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다뤄진 문제이며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와 질 들뢰즈의 윤리, 정신분석 이론, 역사 인식론에서도 이런 주제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갤리슨 교수는 “핵 폐기물 분야에도 인문학적 요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핵 폐기물 경고 표식을 언어형태로 해야 할까, 아니면 그림문자 형태로 해야 할까”라고 질문을 던진 후 “수백 년 간 인류가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경고표시가 되어 있는 무덤을 파헤쳐 온 것을 생각하면 부지에 전혀 표시를 하지 않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것들을 결정하기 위해 미국 에너지부는 기호학자, 인류학자, 고고학자, 언어학자등의 도움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갤리슨 교수는 “현재 우리는 컴퓨터 암호를 중시하고 이해관계에 따른 계산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며 “인문학자들이 연구하는 지식은 자신의 역사와 세상에 대한 의미를 도출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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