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기가 끝나면 누구나 학업에 지친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 싶어진다. 굳이 먼 곳까지 눈을 돌리지 않아도, 본교 주변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부담 없이 들러볼 수 있는 정갈하고 담백한 명소들이 있다.
길상사, 장수마을, 정릉, 심우장 그리고 이태준 생가는 정신을 맑게 해줄 대표적인 장소들이다. 도심 속에 자리한 청정도량부터 만해 한용운 선생의 독립정신을 느낄 수 있는 유택, 그리고 조선 최고 문인의 생가를 활용해 만든 전통찻집까지.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명소들에서 그간 잊고 지내던 소중한 가치를 배워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학기가 종강한 뒤에는 가까운 곳부터 들러 자신의 한 해를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느끼고 싶다면 <심우장>

 

▲ 사진 | 고대신문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까만 대문이 있는 집이 나온다. 평생을 조국 독립에 힘썼던 만해 한용운의 유택, 심우장이다. 작고 소박한 집 가장 왼쪽에 위치한 방은 만해의 서재다. 서재 문 위에는 ‘심우장’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데, 이는 만해와 독립 운동을 같이했던 서예가 오세창이 썼다. 서재에는 한용운이 생전에 쓴 친필이 담긴 글과 승려복, 책이 담긴 가구가 있다. 그 옆방에는 만해의 습작과 신문 기사 등 여러 문서들이 진열돼 만해가 어떻게 살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심우장(尋牛莊)은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소’는 불교에서 마음을 상징한다. 즉, 심우장은 깨달음을 공부하는 장소이다. 심우장은 북향인데, 한용운이 남쪽에 위치한 조선총독부 건물을 등지고자 한 선택이었다. 마당 한 편에는 키 큰 향나무가 있는데, 휘어짐 없이 꼿꼿한 이 나무가 한용운의 정신을 보여주는 듯하다. 심우장 관리자 양혜진씨는 “독립운동가 만해가 심우장에 살았을 당시, 의경들은 한용운이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바깥출입을 막았다. 그래서 만해는 글로 사람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진행해 나갔다”며 “신념을 가지고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는 것, 이것이 만해 정신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서울시는 ‘사색의 공간’ 중 하나로 심우장을 꼽았다. 사색하기 좋은 공간답게, 심우장을 찾은 사람들은 주로 나무로 된 마룻바닥에 앉거나, 집을 한 번 돌아보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였다. 심우장을 둘러보던 김예진(여·20) 씨는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느끼고자 이곳에 오게 되었다”며 “고즈넉한 분위기에 절로 사색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독립 운동가로서, 또한 작가로서 한용운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심우장은 찾아온 이들에게 잠시 멈추고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있다.

 가는 방법
안암역 버스정류장에서 고려대 이공계방향으로 1111번 버스를 타고 ‘명수 학교’ 정류장에서 내린다. 만해의 산책공원을 지나 골목길을 올라가다 보면 심우장이 보인다.

 도심에서 맡는 정겨운 향기 <장수마을>


  서울성곽 산책로에 인접해있는 장수마을에 들어서자 꼬불꼬불한 골목과 깎아지른 언덕이 맞이했다.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길 옆으로는 서울 도심에 있는 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되고 낡은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낡은 집 옆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공원에는 산책을 하거나 운동시설을 이용하는 주민들이 있었고, 공원 근처 정자에는 할머니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트로트 음악을 들으며 밤을 깎고 있던 한 할머니는 “몇 년 전에 마을 주위로 산책로가 생겼다”며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서 마을에 활기도 생기고 운동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장수마을은 예전 시골의 정취를 담고 있는 한편, 집을 수리하기 위해 공사 자재를 옮기는 트럭도 종종 눈에 띄어 색다른 인상을 풍겼다.

  장수마을의 160여 채의 집은 도시화 이전 서민들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는 대부분이 노인인 장수마을의 주민들이 무분별한 재개발이 아닌 마을의 고유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마을을 가꿔왔기 때문이다. 장수마을은 근대화 이전 서울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며, 행정당국과 주민 간의 합의를 통해 마을을 발전시키는 모범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장수마을은 2004년 재개발 예정구역으로 지정됐지만, 서울성곽과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 등의 문화재를 포함하고 있고 급경사로 이루어진 구릉지에 있다는 점 때문에 재개발 사업이 미뤄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08년에 재개발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모임이 만들어졌으며, 주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서울시와 성북구는 2013년 재개발 예정구역 지정을 해제했다. 또한, 주거환경관리 사업을 통해 장수마을이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면서도 쾌적하고 깔끔하게 변화하도록 했다. 급격한 도시발전이 아닌 여유로운 상생을 선택한 장수마을은 서울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면서도 한가로운 시골의 향기가 가득하다.

가는 방법
창신역 4번 출구로 나와 종로 03 마을버스를 타고 낙산공원 정류장에서 내려 장수마을을 만날 수 있다.

서정적인 소설같은 작은 집 <이태준 생가>

  성북동 300번지에 위치한 이태준길 초입에 있는 이태준 생가 앞에 다다르자 壽硯山房(수연산방)이라 쓰인 현판이 방문객을 반긴다. 수연산방은 소설 ‘황진이’로 유명한 작가 이태준이 지은 당호이다. ‘문인들이 모이는 산속 작은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커다란 사철나무를 마주하게 된다. 1933년부터 14년간 이 곳에서 글을 집필한 상허 이태준의 발자국을 따라 돌길을 걸어본다. 돌길을 따라 걷다보면, 빨간 낙엽이 떨어져 있는 마당을 지나 현재는 전통찻집으로 사용되는 고택에 다다른다. 고택 안에는 이태준의 문집과 사진이 곳곳에  놓여있다. 자연스럽지만 견고하게 지어올린 집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태준 생가의 주인인 이태준의 별명은 ‘한국의 모파상’이다. 단편소설의 서정성과 완성도를 높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받는 이태준은 1930년대에 ‘시는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이라고 회자될 정도로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이태준의 작품에는 자연환경을 사랑하는 마음과 순수한 그의 감정이 잘 드러난다. 특히 그가 집필한 ‘무서록’에는 이 생가에 대한 애정이 잘 드러난다. 실제로 이태준 생가는 마치 그의 문학작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했다.

 

 

가는 방법
  고대정문 앞 혹은 안암역 2번 출구 버스정류장에서 1111번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후에 성북구립미술관에 내려, 성북구립미술관을 지나 조금 걸으면 이태준 생가가 나온다.

 서정적인 소설같은 작은 집 <길상사>
  성북구 성북 2동 선장로길을 따라 완만한 오르막길을 올라가다보면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처마를 이고 있는 길상사의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은 ‘온 우주가 내 한 마음에 있다’는 일심법계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일주문을 통해 길상사에 들어서는 것은 곧 속세에서 부처의 세계로 들어섬을 의미한다. 일주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본당인 극락전이 바로 보인다. 극락전을 옆으로 웅장한 지붕을 이고 무겁게 드리운 법종이 가을의 운치와 어울려 아름다움을 더한다.

 

  길상사 안에 있는 설법전 앞마당에는 영안모자의 백성학 회장이 종교화합을 기원하여  기증한 길상칠층보탑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길상7층보탑은 지혜와 용맹을 상징하는 암수 사자 네 마리의 기둥이 조화를 이루어 고풍의 미를 더해주고 있다. 입을 연 두 마리는 교(敎)를, 입을 다물고 있는 두 마리는 선(禪)을 상징한다.


  ‘길상사’는 고급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 철학에 큰 감명을 받아 1000억원대의 대원각 건물과 부지를 법정스님에게 시주하면서 탄생했다. 법정스님은 길상사를 통해 우리의 마음과 세상, 자연의 모습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고자 했다. 이 정신을 이어 받은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법정스님의 뜻을 본받아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고 은혜로운 자연을 본래 모습 그대로 지켜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가는 방법
  정문 앞에서 1111번 버스를 타고 서울구립미술관·쌍다리앞역에서 하차해 성북로 28길을 따라 직진하다 보면 길상사가 보인다.

 조선의 첫번째 왕비의 능 <정릉>

 

 


  정릉 입구 정류장에서 내려 낡고 비좁은 골목길을 따라 10여 분을 걷자 정릉이 모습을 드러냈다. 6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성북을 지켜온 정릉은 조선의 첫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가 잠들어있는 무덤이자 치열한 정치 다툼이 벌어진 현장이기도 하다. 문화해설사 한혜선 씨와 함께 정릉의 역사와 가치를 돌아봤다.

  “태조는 그녀를 유달리 사랑했어요. 그녀가 죽자 상복을 입은 채 직접 능 자리를 알아보러 다닐 정도였죠.” 한혜선 씨는 정릉을 ‘한이 많은 무덤’이라고 표현했다. 살아서는 태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권세를 누렸던 신덕왕후였지만, 사후 태종에 의해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태조 즉위 이전에 사망한 신의왕후의 아들들이 아닌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통해 그녀의 두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런 그가 그녀의 무덤을 가만히 둘 리 없었고, 보란 듯이 그녀의 위신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태종은 그녀의 지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원래 정동에 있던 그녀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도록 명령했어요. 청계천에 광통교를 건설할 때는 정릉의 석물들을 가져다 사용하게 했죠.”

  현종에 이르러 그녀는 왕후의 지위를 회복했고 정릉 역시 능의 모습으로 복원되긴 했지만, 정릉의 모습은 다른 능과 비교하여 더없이 단조롭다. 능침공간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은 물론 무인석도 놓여있지 않고, 능의 남쪽으로 곧게 뻗어있어야 할 홍살문은 좁은 지형 때문에 옆으로 꺾어져 자리하고 있다. 정자각 좌측에 위치한 소전대는 누군가에 의해 뽑혀 버려졌다가 2009년에 이르러서야 약수터 근처에서 발견됐다. 대한제국에 이르러 황후로 추존되었다고 적혀진 비석의 내용만이 조선 초대 왕비의 무덤인 정릉의 특별한 가치를 오롯이 나타내고 있다.

  정릉 주위로 조성된 산책길은 한 바퀴를 돌아 정릉으로 돌아오기까지 5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짧은 길이지만, 신덕왕후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많은 생각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길이다. 가을의 정취와 겨울이 쌀쌀함이 교차하는 날에 만난 정릉은 담담하면서도 쓸쓸한 모습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는 방법
  개운사입구 정류장에서 2115번 버스를 타고 정릉입구 정류장에서 내린다. 하차 후 아리랑시장 골목으로 들어가 표지판을 따라 10여분을 걷다보면 정릉 매표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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