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공감대는 2007년 이후 5번 총학생회를 당선시킨 선거본부의 명칭이다. 제 40대 안암총학생회 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고대공감대는 2007년, 2008년, 2012년, 2013년, 2014년 총 5차례 총학생회를 배출했다. 하지만 2014년 11월, 고대공감대는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져 집행부가 전원 사퇴하며 한 순간에 영예를 잃었다. 이후 중앙운영위원회(중운위)와 전체학생대표자회의(전학대회)를 거치며 ‘제 47대 안암총학생회 선거 무효’로 고대공감대는 그 막을 내렸다.

▲ 일러스트 | 김채형 전문기자

고대공감대가 처음 당선된 배경은 무엇일까. 또 그 명맥을 유지하며 5년간 안암총학생회를 지킨 원동력은 무엇일까. 고대공감대가 학생사회 전반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박원익 대학원총학생회(원총) 회장, 문과대 학생회 집행부에서 활동했던 강태경(철학과 07학번) 씨, 2011년부터 2년간 회칙개정특별위원을 맡았던 김예찬(사학과 06학번) 씨, 수년간 학생사회의 자료를 모아온 하인혜(남·26) 씨 그리고 고대공감대 집행부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 사회적 이슈에 목소리를 내고 있는 고대공감대. 사진 | 고대신문 DB


고대공감대의 시작
고대공감대 선본은 2005년 11월, 제 39대 안암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선거에는 고대공감대를 포함한 6개의 선본이 출마했지만 안암총학생회장단 선거 투표율이 47.92%로 당시 회칙의 기준인 50%에 미달해 투표가 무산됐다. 이에 2006년 3월, 재투표가 실시됐고 이때 고대공감대는 재출마하지 않았다.
이후 고대공감대는 2006년 11월, 제 40대 안암총학생회 선거에서 당선됐다. ‘교수감금사태’가 당시 고대공감대의 당선원동력으로 꼽혔다. 교수감금사태는 2006년 당시 병설보건대(보건대)가 고려대로 통폐합되면서 ‘기존 보건대 학생들에게 총학생회 투표권을 인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에서 발단했다. 보건대 학생의 투표권을 주장하는 학생들은 학교당국에 이를 인정해달라는 입장이었고, 학교 측은 학생사회 내부의 일에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요구를 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본관점거로 이어졌고 처장단과 몇몇 교수는 본관에서 17시간동안 갇혀있었다. 이 사건으로 본교는 상벌위원회를 열어 시위 학생 중 19명을 학칙에 의거해 징계조치했고 그 중 7명을 출교조치 했다. 징계 받은 학생들 중에는 이유미 제 39대 안암총학생회장 등 총학생회 집행부원도 포함됐다. 출교란 최고 수준의 징계 조치로서 퇴학과 달리 재입학이 불허되는 처벌이다.
박원익 원총회장은 고대공감대의 당선이유로 당시 시위 방법에 대한 일반 학생의 피로감을 꼽았다. 그는 “보건대 학생의 투표권 인정 여부를 떠나 의견 표명의 방법 자체가 과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았다”며 “시위를 주도했던 소위 ‘운동권’에 대해 ‘무턱대고 반대만하는 집단’이란 생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예찬 씨도 이에 동의하며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의 의사표현 방식에 반대하며 검은 옷을 입었던 이른바 ‘검은 옷 시위’를 예로 들었다. 그는 “제 45대 안암총학생회 선거에서 고대공감대가 ‘검은 옷 시위’를 지지했던 학생들의 힘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선했던 고대공감대
제 39대 안암총학 선거유세 당시 고대공감대는 새로운 비전을 내세웠다. 김예찬 씨는 “무조건 소위 ‘운동권’에 반대하지도 않으면서 학생복지에 집중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며 “이에 고대공감대의 선거용 리플렛을 보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고대공감대는 제 45대 안암총학생회장단 선거에서 당선됐다. 제 44대 안암총학생회의 불충분한 의견수렴이 고대공감대의 당선에 기여했다. 김예찬 씨는 “2011년 새내기콘서트와 반값등록금 사태 등 44대 안암총학생회의 학내 의견수렴은 비민주적이었다고 평가된다”며 “45대 안암총학생회 선거에서 학내 소통에 중점을 둔 고대공감대의 공약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고대공감대의 집행부원이었던 A씨도 고대공감대가 ‘학내소통’에 초점을 맞춰 일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대공감대는 ‘학생들에게 시선을 맞추는 비전제시’를 위해 노력했다”며 “2000년 이후 사회 이슈 보다 학생의 복지 등 학내 이슈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의 의식 변화를 반영했다”고 말했다. 하인혜 씨는 고대공감대의 기조와 타 대학과의 차이점에 대해 말했다. 그는 “타 대학의 ‘비운동권’이 단순 이벤트 업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과는 달리 고대공감대는 학내 소통을 통해 나름의 ‘운동’도 했다”며 “이는 고대공감대에게 혐오감을 가졌던 소위 ‘운동권’의 반감을 감소시켰다”고 말했다.
고대공감대가 다년간 총학생회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원동력이 조직적 특성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강태경 씨는 “기존 총학생회와 다르게 기층 조직단위가 없어 다양한 집행부원을 무작위로 확보할 수 있었다”며 “이런 점이 여론수집의 수월성과 논의 자체에서의 다양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대공감대의 버팀목, 고파스
학내 커뮤니티인 고파스는 고대공감대의 당선요인 중 하나로 꼽혔다 고파스가 고대공감대의 소통의 창구였다고 말하는 강태경 씨는 “고파스는 파편화된 학생들에게 가장 최적화된 공론의 장으로서 학생들이 의견을 교류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곧 고파스는 본교 학생 전체에게 그들의 공공재로 인식될 만큼 활발한 공론장이 됐다”고 말했다. 박원익 원총회장도 이에 동의하며 “안암총학생회가 고파스에서 형성된 여론을 적절히 참고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대학 커뮤니티와 고파스를 비교하며 고파스의 특이성을 언급한 하인혜 씨는 “온라인 커뮤니티 운영자가 여론 형성을 방관하는 타 대학과 달리 박종찬 전 회장은 고파스 운영자로서 여론을 방관하지 않았다”며 “이는 고파스가 공론장 역할을 활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평했다.
고대공감대의 몰락과 학생사회
고대공감대의 초기 모습부터 지켜본 사람들은 고대공감대의 몰락을 어떻게 생각할까. 강태경 씨는 고대공감대의 자멸에 대해 학생사회 발전의 기회를 놓쳐 안타깝다고 평했다. 그는 “고대공감대 외의 선본이 고대공감대만큼 신선한 정책으로 등장하길 기대했다”며 “하지만 고대공감대 스스로의 몰락은 학생사회가 스스로 다원화될 기회를 잃어버리게 했다”고 말했다. 박원익 원총회장은 고대공감대의 몰락이 박종찬 전 회장 개인의 몰락이라고 평했다. 그는 “박종찬 전 회장은 고파스 내의 논쟁에서 비교적 중립을 지키며 ‘학생사회의 어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하지만 부정선거 사태로 이 이미지가 한 순간에 깨져버렸다”고 말했다.
반면 하인혜 씨는 이번 부정선거 사태를 본교 학생사회가 타 대학 학생사회와 다르게 자정능력을 확인한 계기라고 평했다. 그는 “다른 대학의 학생사회는 상대 후보를 무리하게 선거 박탈시키고 부정적으로 장기 집권하는 등의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며 “고대공감대의 마무리는 정말 아쉽지만 고려대 학생사회가 건강하고 자정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고대공감대의 몰락은 학생사회에 큰 과제를 남겼다. 박원익 원총회장은 고파스 외의 새로운 공론장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특성상 선정적 이슈에 학생들의 관심이 쏠린다”며 “정책토론을 활발히 할 수 있는 공론장을 모색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예찬 씨는 “학생회가 필요 없다는 ‘학생회 무용론’까지 등장하는 현실에서 ‘어떤 학생회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 후 학생회의 방향성이 재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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