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은 관념과 이념적인 것에 집중하는 여타 철학에 비해 실생활에 집중한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그의 저서 <지각의 현상학>에서 ‘우리와 세계는 상호 지향적으로 얽혀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세계를 지각하는 동시에 곧 세계라고 하는 범위 내에서 내가 지각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예를 들어 학창 시절에 대한 기억, 다음 주에 떠나는 여행에 대한 예상, 배가 고프다는 현재의 생각 등 인간이 세계를 의식하는 작용도 현상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셜

실생활 속의 의식작용을 현상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상 속의 상황을 가정해 현상학 관련 논문, 인터뷰, 강연을 토대로 실생활 속의 의식작용을 현상학적으로 해석해봤다.

#1.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되니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기분이 너무 좋다. 오늘따라 세상이 아름다운 것 같다. 성적이 나온 날에는 날씨가 좋은 것마저 짜증났었는데…….

▲ 기분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느껴진다. 일러스트│김채형 전문기자

하이데거는 이를 ‘기분의 현상학’이라고 했다. 기분은 클럽의 사이키 조명처럼 세상에 일정한 색조를 부여하기 때문에 기분에 따라 의미로서의 세계가 다르게 주어진다. 다시 말해 기분은 의식 대상에 채색된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초월론적 태도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의미’다. 인간의 의식이 구성한 의미가 모여 이뤄진 세계는 ‘의식의 총체’다. 개인의 의식이 의미로서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 투영되는 것이다.
변화의 근본적인 이유는 의식에 있다. 사람의 의식이 변하면 의미도 따라 변한다. 의식이 변화하기 때문에 세계가 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이 좋으면 짜증이 나던 것도 좋게 보이고, 쳐지고 세상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상태로 아침이 시작된다면 세상이 좋지 않아 보이게 된다. 세계에 대한 불만은 마음 속 슬픔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

#2. 학교 가는 길에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내 이름까지 알고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와 유치원 동창이라고 한다. 어릴 때 나와 함께 찍은 사진까지 보여준다. 분명히 사진 속 인물은 내가 맞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기억도 자기의식의 일부다. 일러스트│김채형 전문기자

아주 어릴 때의 체험은 의식의 심층부에 있기 때문에 쉽게 포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기억하지 못해도, 이러한 의식은 인간을 구성하는 일부다. 심층에 있건 아니건, 모든 의식을 합쳐 자기의식이라 부를 수 있다.
자기의식을 분류하는 데는 여러 기준이 존재한다. 의식의 대상이 반성을 통해 직접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지 여부는 이러한 기준 중 하나다. 반성을 통해 포착할 수 있는 자기의식은 현재 시점에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자기의식이다. 반성을 통해 파악할 수 없는 자기의식도 존재하는데, 의식의 심층부에 있는 무의식을 대상으로 한 의식, 먼 과거의 일이라 기억할 수 없는 의식을 대상으로 한 의식이 이에 해당된다.

#3. 중앙도서관에서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있었던 박완서의 <옥상의 민들레꽃>를 발견해 읽었다. 초등학생 때는 주인공의 시선에서 읽어서인지 어른들이 마냥 나쁘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소설 속 어른들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 10년 전과 지금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책은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 것 같다.

의식은 매 순간 변화한다. 그렇기에 똑같은 대상이라도 10년 전과 지금 시점에서 다르게 인식 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은 강물과 같이 끊임없이 새롭게 솟아나며 흘러간다. 매 순간 주어지는 자극에 대한 지각작용이 있기도 하며, 자극이 없다면 의식 심층부의 무의식이 작용한다. 또한 과거로 흘러가는 의식을 기억 속에서 잡고 있기도 한다. 때문에 똑같은 의식이 두 번 있을 수는 없다. 주관은 늘 새롭게 구성되며, 매 순간 창조가 일어난다. 의식이 투영된 의미로서 세계를 인식하는 초월론적 태도에서 본다면 순간마다 세계가 새롭게 변하는 것이다.

#4. 방학이라 학생상담센터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상담사에게 한창 성적과 학교생활에 대해 하소연을 하고 나니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심리 상담 때마다 항상 나만 말하고 상담사는 듣기만 한다.

▲ 현상학은 상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일러스트│김채형 전문기자

현상학은 철학에 그치지 않고 심리학과 교육치료학, 정신분석학 등의 분야에 적용된다. 현상학이 적용된 학문은 실천적 학문으로 발전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는 ‘인본주의 심리학’을 창시했다. 로저스는 상담자가 지시적으로 행동하는 기존의 상담 방식에서, 내담자의 이야기를 상담자가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공감하는 ‘비지시적 상담’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했다. 기존의 상담자중심 상담방법에서는 상담자가 조언을 하는 것이 상담의 주였지만, 로저스가 제시한 내담자중심 상담방법에서 상담자는 내담자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며, 내담자가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편모가정의 내담자가 상담을 받는다고 가정했을 때, 상담자가 편모가정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면 선입견이 상담에 반영돼 내담자의 경험이 왜곡된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 현상학적 관점에서 왜곡된 내담자의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의 경험이 아니므로 진실이라고 볼 수 없다. 현상학의 영향을 받은 내담자 중심 상담에서는 내담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경험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5. 집에 오니까 얼마 전 결혼한 사촌언니가 와있다. 임신 8개월 차인 언니가 배를 만져보라고 한다. 만져보니 배 속의 조카가 발길질 하는 것이 느껴진다. 자꾸 발을 만지려고 하니 아기가 피한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도 의식이 있나보다.

배 속의 아기가 자극을 느끼고 이에 반응한다는 것은 아기의 의식이 암묵적으로 감각하는 대상과 자기 자신을 분리해 이해하고 있음을 뜻한다. 감각을 한다는 것은 선반성적 작용이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자연적 태도에서 자기의식의 발생 과정을 보면, 반성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포착할 수 있는 ‘선반성적 자기의식’이 생긴 후 이를 토대로 반성을 수행했을 때 포착할 수 있는 ‘반성적 자기의식’이 발생한다. 인간의 의식은 선반성적 자기의식을 반복적으로 작동하면서 이의 습성체계를 발전시켜 반성적 자기의식을 수행하는 것이다.

#6. 저녁에 과외를 하러 갔다. 수능특강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나왔다. 과외 학생이 내게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전개가 일반 소설이랑 달라서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불평한다.

현상학은 사회과학적 연구뿐 아니라 문학에도 적용된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볼 수 있는 ‘의식의 흐름 기법’은 현상학을 소설 양식에 응용한 예다.
‘차장이 다시 그의 옆으로 왔다. 어디를 가십니까, 구보는 전차가 향하여 가는 곳을 바라보며 문득 창경원에라도 갈까, 하고 생각한다.
차는 서고 또 움직였다. 구보는 창 밖을 내어다 보며, 문득 대학병원에라도 들를 것을 그랬나, 하여 본다. 연구실에서, 벗은 정신병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를 찾아가 좀 다른 세상을 구경하는 것은 행복은 아니어도 어떻든 한 개의 일일 수 있다.’
이와 같이 저자는 주인공 ‘구보’가 세계에 대해 인식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서술한다. 소설에서 사용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은 인물의 경험과 직관을 중심으로 세계를 표현한다. 이는 본질에 대해 직관하고 기술하는 현상학적 기술 방식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은 문학의 ‘모더니즘 경향’이 발생하며 고안됐다. 현대 문명과 산업사회라는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선 새로운 언어와 용법이 필요했다. 때문에 모더니즘은 기존 세계의 의미에 도전하며 새로운 의미와 언어 창출을 시도했다. 현상학은 이러한 모더니즘의 움직임에 부합하는 이론이었다. 기존의 의미 구조를 판단 중지해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는 ‘현상학적 환원’은 모더니즘의 물결 속에서 문학에 응용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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