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주의가 주류였던 20세기 철학계에서 후설은 ‘현상학’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펼쳤다. 현상학은 가장 근원적인 것, 즉 ‘현상 자체’로 돌아가 이를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철학이다. 후설은 그의 저서 <논리연구>에서 철학을 수학과 같은 엄밀한 학문으로 구축하고자 시도하며 자신의 철학을 ‘현상학’이라 불렀다.
후설 이후에도 하이데거 등의 철학자는 현상학을 연구해 나갔다.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서도 후설의 현상학은 꾸준히 연구됐다. 특히 이남인(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세계적인 현상학 대가로 인정받아 2008년 한국 철학자 최초로 국제철학원 종신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2014년 12월 22일, ‘자기의식의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을 주제로 본교에서 열린 이남인 교수의 강연을 통해 후설의 현상학에 대해 알아봤다.

▲ 이남민(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자기의식과 현상학'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구성, 의식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작용
후설은 현상학을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으로 나눠 전개했다. 이남인 교수는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을 사람이 자신을 의식하는 방법과 연관 지어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을 ‘구성’을 해명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구성’이란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일종의 의식작용이다. 이남인 교수는 예를 들며 구성을 설명했다. “여러분이 이 교탁을 볼 땐 앉아있는 위치가 달라서 각자 다른 관점에서 봅니다. 왼쪽에서 봤을 때와 오른쪽에서 봤을 때가 다르죠. 교탁 뒤에서 어떻게 보일지도 생각합니다. 의식은 여러분이 본 정보를 종합해 교탁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죠. 이것이 구성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강의를 들으면서도 구성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제 목소리, 표정, 몸짓, 제가 쓰는 글씨를 보고 여러분의 의식은 이를 토대로 강의 내용을 구성해 나갑니다.”
정적 현상학은 초시간적인 사건의 타당성의 관점에서 구성을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선후관계가 명확한 사건을 탐구하는 발생적 현상학과 달리, 정적 현상학은 사건의 논리적 타당성에 대해 탐구한다. 교수는 교실에 있는 공책의 색깔과 모양에 대해 두 학생이 교실 밖에서 토론을 벌인다는 상황을 가정했다. “학생들이 실제로 공책의 색깔을 알려면 공책을 직접 봐야 합니다. 교실 밖에서 가지던 공책에 대한 기억상(象)의 타당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교실로 들어와 지각해야 합니다. 이 경우 공책의 어느 면을 먼저 보든 상관이 없습니다. 공책의 색이라는 것은 초시간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발생적 현상학은 구성의 시간적 발생 단계를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정 사건의 시간적인 발생 구조를 헤아려보는 것이다. 발생적 현상학에서는 정적 현상학과 달리 순서와 시간을 고려해야 한다. 지층의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 각 층이 어떤 시대에 어떤 순서로 쌓였는지를 알아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의 순간적 의식만이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자기의식의 정적 현상학은 절대적인 진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회의주의에 반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필증적 명증성을 지닌 지식이 존재함을 증명해야 한다. 후설은 이를 위해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사용했다. 이는 절대적 타당성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을 하나씩 배제해 필연적으로 옳은 것만을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과거의 체험인 기억과 미래에 대한 다가올 체험인 예상을 지울 수 있다. 이 교수는 “후설은 ‘우리의 자연적인 경험도 세계가 나름대로 연결되어 있는 꿈으로서의 가상임이 밝혀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며 “우리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한 것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으로 심층부의 무의식까지 배제하면, 남는 것은 현재에 대한 순간적인 의식뿐이다. 이남인 교수는 이를 ‘초월론적 자기지각’ 내지 ‘내재적 지각’으로 표현했다. 초월론적 태도에서 본 세계는 개인의 주관이 인식하는 의미로 이뤄지기 때문에, 초월론적 자기지각에서는 지각 작용이 대상을 자신 안에 품고 있다. 의식의 주체와 대상이 같은 지점에 있는 것이다. 현상학이 직관의 철학인 이유다. 이 교수는 “타당성에 관한 논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논쟁이 일어난 당시를 잘 지각해야 한다”며 “직관은 철학을 수학과 같은 엄밀한 학문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절대적으로 타당한 의식이 순간적이지 않은, 지속을 가지고 있는 의식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필증적 명증의 양상에서 경험되는 의식은 어느 정도 두께를 가진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상을 이렇게 4번 ‘쿵, 쿵, 쿵, 쿵’ 칩니다. 우리 의식이 두 번째 ‘쿵’을 향해 의식하면 첫 번째 박자에 대해 의식합니다. 세 번째, 네 번째 것을 인식할 때 그 이전의 박자에 대해서도 의식합니다. 만일 의식하지 않는다면 음악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매 순간을 의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초적인 기억력과 예상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초월론적 자기지각은 이전 것과 미래의 것을 파악하는 의식과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의미로 이뤄져 있다
자기의식의 발생적 현상학은 자기의식이 발생하는 과정을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발생적 현상학은 그 내부에서 ‘세속적 자기의식의 발생적 현상학’과 ‘초월론적 자기의식의 발생적 현상학’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세속적 자기의식의 발생적 현상학’은 세속적 자기의식의 발생을, ‘초월론적 자기의식의 발생적 현상학’은 초월론적 자기의식의 발생을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세속적 자기의식은 자연적 태도에서 발생하며, 초월론적 자기의식은 초월론적 태도에서 발생한다. 이 교수는 자연적 태도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태도’라고 설명했다. “자연적 태도에서 의식은 사람의 내부에 있고, 사람, 책상, 의자를 비롯한 모든 것은 외부에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세계는 세계를 이루는 것들의 총체입니다. 의식을 비롯한 모든 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것 중의 하나죠.” 초월론적 태도는 ‘다양한 개별 의미’가 모여 이뤄진 것을 하나의 세계로 인식한다. 이 때 의식은 세계를 인식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운동장과 교실, 연구실은 각각의 의미가 다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로 어떤 찰나의 시간은 삶 전체를 바꾸지만, 어떤 시간은 100일이 지나도 별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시공간 속의 모든 것은 의미를 가집니다.”
초월론적 자기의식과 세속적 자기의식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의식작용을 수행하는 자아가 누구인지와 의식의 위치를 어디로 인식하는지에 달려있다. 자아와 의식의 위치에 대한 인식 차이는 각 자기의식의 발생에 차이를 만드는 근본 원인이다. 세속적 자기의식은 이러한 자아와 의식을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반면, 초월론적 자기의식은 초월론적 자아와 의식으로 파악한다.
두 자기의식의 발생은 선반성적 자기의식과 반성적 자기의식의 발생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교수는 “세속적인 선반성적 자기의식은 태아가 모태 안에서 감각하기 시작한 순간 발생한다”며 “느낀다는 것은 의식이 감각하는 대상과 자기 자신을 분리해 이해하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누구에게나 발생하는 세속적 선반성적 자기의식과 달리, 초월론적 선반성적 자기의식은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순간 발생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발생하지는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선반성적 자기의식이 반복적으로 작동하며 발생하는 ‘세속적인 반성적 자기의식’과 달리, ‘반성적 초월론적 자기의식’은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이 일어난 후 이뤄지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을 뜻한다. 현상학적 환원의 의미에 관해 묻는 질문에 이 교수는 태도 변화로 이를 설명했다. “현상학적 환원이란 태도가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자연적 태도에서 초월적 태도로 넘어가는 것뿐만 아니라, 물리학적 태도에서 사회적 태도로 넘어가는 등의 태도변경도 현상학적 환원에 해당하죠. 이렇게 태도를 변경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변화하려는 태도에 온 정신을 집중시켜야 하겠죠? 온 정신이 집중돼있으면 여타 다른 것에 대해 신경을 끄는 상태가 돼요. 이 상태를 ‘판단 중지’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남인 교수는 강연을 마무리하며 자기의식을 현상학과 연관 짓는 것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 교수는 “후설은 여러 곳에서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의 구별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자기의식의 현상학을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으로 나누어 전개하지는 않았다”며 “이러한 점에서 이번 강연의 논의는 후설의 분석을 토대로 함과 동시에 넘어선 논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자기의식을 현상학과 연관 지어 보는 관점은 자기의식과 관련된 다양한 철학적 문제를 해명함에 있어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며 “후설 이전에 활동했던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의 자기의식이론을 현상학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그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용어 정리
필증적 명증 : 필연적으로 틀릴 수 없는 진리
선반성적 자기의식 : 의식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있다가 반성적인 행위를 통해 알게 되는 자기의식
반성적 자기의식 : 의식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반성적인 행위를 통해 알게 되는 자기의식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 : 초월론적 태도를 향한 변화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