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우리 집은 왜 이래?” 이일수(29·남) 씨가 20년 전 초등학교 1학년 때 그의 아버지에게 물은 질문이다. 2월 3일 동자동 쪽방촌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이 씨의 집을 찾았다. 현재 그는 가양동의 한 영구임대주택에 아내 오승희(29·여) 씨와 딸 이유리(3·여) 양과 살고 있다.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오른편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가 방 한 중간에 이 씨가 앉았다. 그 방은 5㎡(1.5평)정도의 크기였다. 작은 방 한 가운데에 그가 앉자 인터뷰할 공간이 넉넉지 않았다. 그 상황을 본 그의 아내가 이일수 씨에게 말했다. “거기 좁아서 못 들어가니까 거실에서 인터뷰해요.” 이후 이일수 씨는 그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눈이 안 보여서요.”

▲ 동자동 쪽방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일수(남.29) 씨사진 | 차정규 기자 regular@

이일수 씨는 동자동 쪽방촌에서 1987년 4월 15일 태어났다. 올해로 29살이 된 이 씨는 필리핀 국적을 가진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난을 이유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했던 그의 20여 년 생활은 어땠을까.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것에 놀랐죠.”
이 씨가 태어나 처음 본 집은 5㎡(1.5평) 남짓 되는 방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그에게는 ‘넓은 집’이란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친구의 집을 보고 놀랐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모두가 저희 집처럼 작은 방에 사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친구 집에 가보니 넓어서 놀랐고, 무엇보다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친구 집에 다녀온 이 씨가 ‘우리 집은 왜 이래’라고 그의 아버지께 여쭤보자 당시 그의 아버지는 단순히 집이 오래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씨는 어렸을 때 가난한 생활 자체에 대해 분노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공중화장실 벽에 똥칠이 돼있는 것을 보며 가난에 대한 분노를 느꼈어요.”
어린 시절 이 씨는 주로 라면과 죽을 먹었다. 아버지께서 반찬봉사를 할 때면 남은 반찬을 가져와 함께 먹었다. 이 씨는 친구의 생활을 부러워하곤 했다. 쪽방에 살다보니 친구를 집에 데려올 수도 없었다.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을 모아 자기 집에서 꼬박 꼬박 생일파티를 했어요. 하지만 어린이 2~3명이 들어오면 꽉 차는 그 공간에는 아무도 초대할 수 없었어요.”
중학교 2학년이던 이 씨는 학교에서 소변검사를 했다. 그는 당뇨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쪽방촌에 거주하는 이 씨의 친구는 결핵으로 학교에 두 달간 결석했다. 이 씨와 같은 병은 아니지만 쪽방촌에 거주하는 그의 또래들 중 대부분은 병을 앓고 있었다. 그로부터 13년 뒤, 이 씨는 당뇨병 합병증으로 양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내가 살아서 뭐하나’라고 생각했지만…”
이일수 씨는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때 실용음악과에서 드럼을 전공한 그는 입학 1년 만에 컴퓨터미디어과로 전과했다. “외부 수업도 많고 돈이 많이 들어 전과할 수밖에 없었어요. 음악동아리 활동을 통해 음악활동을 멈추진 않으려 했어요.”
대학에서 보건복지과를 전공한 이 씨는 대학 2년간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학점 평균 B이상을 받으면 등록금이 면제됐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다.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았기에 저도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의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동사무소에서 사회복지사란걸 말하면 기초수급자 자격이 탈락될 수도 있다’ 라고요.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요.” 부양의무자 기준이란 직계가족 중 한 명 이상이 가족을 부양할 능력의 기준이다. 이 씨는 그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씨는 당시 또래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회상했다. “친구들이 ‘직장 어디냐’, ‘사회복지사는 왜 안 하냐’ 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때마다 일일이 대답했고 그때마다 ‘난 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없을까’라고 생각했죠.”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의 상황은 그를 힘들게 했다.
25살이 되던 2011년 어느 날, 그는 동부 이촌동 거북선 나루터를 찾았다. 아버지께는 밝히지 않은 채 그는 소주 10병을 들고 한강을 마주봤다. “죽을려고요.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는 한강대교 위에서 죽음을 생각했던 그의 머릿속엔 “가난으로 인해 이렇게 괴로운데 살아서 뭐해”라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혼자 계신 아버지가 떠올라 그는 결국 다리에서 내려왔다. “버팀목이 돼주신 아버지를 놔두고 갈 순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일을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죠.”


“보수가 적어도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었어요.”
이후 이 씨는 편의점에서 일했다. 열심히 일해 그는 편의점 점장이 되기도 했다. 한 달에 150만원까지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수익이 생겼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을 박탈당했다. 수급자 자격을 박탈당했지만 그는 한 달에 150만원을 버는 편의점 일 대신 어려운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서울시 디딤돌사업에 동참했다. 그 이유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을 떠올렸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월급이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셨어요. 디딤돌사업에서 시급 4300원을 받았지만 저에게 하고 싶은 일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에요.”
이일수 씨는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에서 그의 아내를 만났다. 그의 아내 오승희 씨는 태어날 때 허리에 물혹을 달고 태어났다. 이후 물혹을 제거했지만 중추신경이 마비돼 하체를 쓸 수 없게 됐다. 이 씨는 바리스타가 꿈인 아내의 장애인 활동보조를 맡으며 아내에게 호감을 느꼈다.
연애 1년이 되던 때에 오 씨는 이 씨와 쪽방에서 동거했다. 그 때를 회상한 오 씨는 동거한 기간 동안 남편의 헌신적인 모습을 자랑스러워했다. “제가 장애인에 여자라 문턱이 높고 샤워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쪽방에서 혼자 씻는 것이 불가능했어요. 그런 저를 남편이 매일 같이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머리 감겨주고 다 씻겨줬어요.”


“32만원이면 우리 생활비 반이 날아가니까…”
결혼 후 2013년 6월부터 부부는 영산조용기자선재단의 도움을 받아 난곡동의 한 영구임대주택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영산조용기자선재단의 도움으로 보증금 200만원을 구했고 덕분에 월세가 다른 곳보다 저렴했죠.” 그리고 2013년 8월, 딸 이유리 양을 얻었다. 부부의 걱정과는 달리 딸은 장애를 안고 태어나지 않았다. 딸이 태어날 때를 회상한 이일수 씨는 당시 많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울었어요. 그리고 아이를 어떻게 키울 수 있을지 걱정했고 잘 키워야겠다고 다짐했죠.”
1월 27일 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2014년 한국복지패널 기초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빈곤탈출률은 22.6%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빈곤탈출률은 저소득층이었던 사람이 중산층 혹은 고소득층으로 이동한 사람의 비율을 말한다. 이일수 씨에게 ‘가난의 대물림’에 대해 묻자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은 되지만 가족 모두가 노력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에요. 유리만큼은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20대를 겪게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는 시각을 잃어 딸을 볼 수 없다. 딸 이유리 양이 태어났을 때 이일수 씨는 이미 신혈관 녹내장으로 왼쪽 시력을 잃었었다. 15살 때부터 앓았던 당뇨병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딸이 100일이 지나고 얼마 후, 오른쪽 눈도 같은 이유로 잃었다. 그는 시력이 감퇴된다는 사실을 알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는 주사로 약을 투여할 것을 권했다. “당시 그 병원에서는 한 번 투여할 때 32만원을 지불해야하는 약을 권했어요” 그 말을 들은 이 씨는 약을 투여할 수 없었다. 수급자인 그에게 1회당 32만원의 약 값을 지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32만원은 우리 생활비의 반이 날아가니까…” 말을 잇지 못하는 이일수 씨를 보고 그의 아내가 말했다. “이것저것 빼고 32만원이면… 그냥 한 달 생활비라고 보시면 돼요.”
그렇게 그 병원에서 4~5개월을 보내던 그는 다른 병원에서 신혈관 녹내장은 수술로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양쪽 눈 40만원의 수술로 나을 수 있는 병이었던 거에요. 심지어 그 40만원은 재단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돈이었어요.”
딸 유리를 잘 키우는 것이 꿈이라는 그에게 어떤 딸로 키우고 싶냐고 물었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도와주고 정의로운 아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현재 그는 노숙인을 위한 음악모임인 ‘아랫마을’에서 젬베를 치고 있다. 그는 앞으로도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제가 힘들어도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고 싶어요. 그게 저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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