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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암동 그 자리에서 그들은 오늘도 노점을 연다
안암동 그 자리에서 그들은 오늘도 노점을 연다
  • 김민지 기자
  • 승인 2015.03.08 2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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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상은 명동, 대학로, 강남 등과 같은 혼잡지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본교 근처에도 오랫동안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노점상이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하루에 한 번은 마주치는 본교 근처 노점상은 어떤 삶을 이어가고 있을까. 안암역 사거리 ‘소리네’와 호두과자 노점, 안암 오거리 거리가게, 법대 후문 순대포차에게 그들의 하루를 물어봤다. 
“학생도 먹고살고 우리도 먹고살고…”
저녁 6시 반, 안암역 사거리 ‘대학약국’ 문이 닫혔다. 옆에서 장사 준비를 하던 노점 하나가 건물 앞 주차장에 나타났다. 8년째 2평 남짓한 건물 주차장에서 노점을 하고 있는 ‘소리네’다.
▲ 3명의 청각장애인이 운영하는 '소리네'의 김은주(여.45) 씨. 사진|장지희 기자 doby@

‘소리네’는 김은주(여‧45) 씨, 은주 씨의 오빠 김영철(남‧48) 씨, 은주 씨의 사촌오빠 김경수(남‧54) 씨 3명이 함께 꾸려간다. 은주 씨와 영철 씨는 청각장애 2급, 경수 씨는 청각장애 1급이다. 은주 씨는 8년 전 인공와우 수술을 한 후 말 배우는 학원에 다니고 있다. 어눌하고 부정확하지만 손님과의 대화는 모두 은주 씨가 맡는다. 영철 씨와 경수 씨는 주로 수화로만 대화한다. 손님이 없을 때 ‘소리네’에선 오로지 호떡 반죽 빚는 소리, 붕어빵 굽는 소리만 들린다. 모든 대화는 침묵 속에서 이어진다.
8년 전 이곳에 자리를 잡기 전에 ‘소리네’는 안암역 지하철 출구 앞에서 노점을 했다. 하지만 인근 건물 식당의 민원으로 자주 단속에 걸렸다. 결국, 다른 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현재 ‘대학약국’ 건물주가 은주 씨의 딱한 사정을 듣고 약국이 문을 닫으면 주차장에서 노점을 하게 허락해줬다. 대가나 비용은 없었다. “정말 감사하죠. 주말에는 약국 안 여니까 낮부터 장사할 수 있어요. 건물주 분 아니었으면 막막했을 거예요.”
‘소리네’ 붕어빵은 1000원에 4개다. 다른 곳은 이미 오래전에 3개에 1000원으로 가격이 올랐지만 소리네는 이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마저도 학생인 손님에게는 항상 붕어빵을 한 개씩 더 준다. “학생들이니까 많이 줘야 돼요. 우리도 먹고살고, 학생들도 먹고살고.”  오뎅, 붕어빵, 호떡, 계란빵 등 여러 종류를 팔고 있지만 하루에 손에 쥐게 되는 돈은 4만 원이 안 된다. “늦은 저녁에 학생들이 혼자 와서 오뎅 6, 7개씩 먹고 가고 그러더라고요. 멀리 가족이랑 떨어져서 학교 다니는데 고생하지.”
오후 6시 30분부터 새벽 1시까지 장사를 하는 은주 씨는 새벽 2시쯤에 집에 들어온다. 하지만 하루 일과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은주 씨는 그날 장사에 쓴 조리도구, 주방용품을 모두 다 정리한다. “우리 집은 그날 쓴 걸 날마다 다 닦아요. 플라스틱도 안 써, 몸에 안 좋아서. 깨끗하게 해야지 더러우면 안 되잖아요.” 청소를 마치고 새벽 4시에서야 그는 잠이 든다. 다음날 장사 준비는 오전 10시부터 한다. “어디서 가져오는 거 없이 매일 다 만들어요. 오뎅 국물은 조미료 안 넣고 9가지 재료 넣어서 2시간 정도 끓이죠. 재료 중에서 사오는 건 오뎅뿐이에요.” 재료 준비를 다 하고 나면 오후가 된다. 그리고 다시 ‘소리네’는 하루 장사를 시작한다.
10년 전 남편과 이혼한 뒤로 은주 씨는 작은 딸과 둘이 살고 있다. 큰딸은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딸애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행이에요. 대학 가겠다고 해서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장애인 보조금이 매달 50만 원 씩 나오기는 하지만 생활비와 병원비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래도 은주 씨는 노점으로 얻은 수입을 조금씩 매달 모으고 있다. 그의 꿈은 돈을 좀 모아 작은 가게를 마련하는 것이다. “노점에선 비 오면 장사하기 힘들고, 오빠 보청기도 문제가 생겨서 장사를 잘 못해요. 돈 모아서 가게 하나 차리는 게 가장 큰 바람이죠.”
허가받은 거리가게지만 장사는 힘들어
▲ 안암오거리에서 거리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호동(남.60) 씨. 사진|장지희 기자 doby@
“7년 전에만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노점상은 완전히 서민장사인데 서민들이 돈이 없으니까 서민장사 다 죽었죠.” 이호동(남‧60) 씨는 안암 오거리에서 7년째 거리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거리가게란 기존의 노점상에게 지자체가 규격화를 조건으로 허용한 노점을 뜻한다. 거리가게가 되면 지자체에서 정한 가게 박스 안에서만 장사할 수 있다. 거리가게에서 레깅스, 스타킹 등을 팔고 있지만 최근에는 하루에 1개도 팔리지 않는다. “고파스에도 우리 가게가 올라와 있어서 예전에는 학생들이 많이 사러 왔어. 그런데 요즘엔 홈쇼핑에서 사는지 안 팔려요.” 너무 장사가 안돼 11월부터는 거리가게 옆에 작은 천막을 만들어 붕어빵 장사를 하고 있다. 아침 9시 30분부터 밤 11시까지 이 씨는 약 14시간을 밖에서 보낸다. 이 씨의 하루 수입은 약 3만 원이다. “하루에 4만 원 이상 벌기 힘들어요. 아침 일찍 나와야 조금이라도 팔지, 집에 있으면 돈이 벌리나. 그렇게 일해도 꽝이에요.”
거리가게로 허가받기 전 이 씨는 성신여대에서 리어카 노점을 했었다. 하지만 주변 상가의 신고로 오래 장사하지는 못했다. 2007년, 성북구청이 거리가게를 제안했고 그는 안암 오거리에 자리를 잡게 됐다. 매년 땅값에 따른 도로점용료로 15만 원 정도를 내게 됐지만 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차라리 불법 노점들이 더 잘 벌어요. 목 잘 잡고 품목 잘 고르면 하루 일당은 하지. 그런데 우리는 움직이지도 못하지. 여긴 목도 아니고 지하철역도 아니고…” 하지만 그는 불법 노점이 아닌 거리가게로 자리 잡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단속 떠도 안 도망가도 되고, 어딘가 정착해서 장사할 수가 있잖아. 이거라도 돼서 다행이지. 지금 거리가게 되려고 줄 선 사람들이 몇 명인데…”
그는 학생들이 없는 여름에는 가게 문을 닫고 부업으로 막노동을 한다. “여름에 장사가 너무 안되니까, 돈 벌라면 이 나이에도 건축 일 해야지. 많이도 못 해요. 한 달에 19일 이상 일하면 세금 떼더라고. 법을 뭐 그렇게 만들어놨는지…”
꿈이 뭐냐고 묻는 말에 이 씨가 허탈하게 웃었다. “꿈? 그런 거 접은 지 오래됐어요. 노점상 하면서 꿈이 어디 있겠어, 장사 잘되는 게 가장 바라는 거지. 경기가 죽어서 그거마저도 안 되겠지만.” 이 씨는 계속해서 새로운 거리가게 아이템을 연구 중이다. 하지만 마땅한 아이템이 없으면 다시 노동일을 할 계획이다. 이 씨가 거리가게를 접으면 안암 오거리 거리가게는 없어지고 만다.
한 가장의 생계 수단, 안암역 호두과자
3월 첫째 주 안암역 사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건널목을 건너자 오른쪽에 파라솔 하나가 보였다. 안암역 사거리 렌즈스토리 앞 작은 공간에서 박한구(남‧54) 씨는 작년부터 호두과자 노점을 시작했다. 그는 법적으로 불법 노점상이다.
▲ 안암역 사거리에서 작년부터 호두과자 노점을 시작한 박한구(남.54) 씨. 사진|장지희 기자 doby@

박 씨는 23년 동안 선릉역 쪽에서 작을 이발관을 하다가 곳곳에 미용실 체인점들이 생기면서 가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는 꽃배달을 시작했다. 하지만 경유 값이 오르고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일에 지쳐 그는 직업 바꾸기로 했다. 1년 여간 고민한 끝에 작년 그는 지인에게 몇 백 만원을 주고 안암역 사거리 호두과자 자리를 샀다. “아는 사람이니까 그 정도에 줬지 원래는 더 비싸요. 강남역, 대학로 이런 데는 몇 천만 원 하기도 한 대요.” 박 씨는 학생들이 많은 겨울에는 7일 내내 노점을 하고 봄‧가을에는 주말에 아르바이트로 꽃 배달을 한다. 7일 내내 쉴 새 없이 일하는 씨의 입술이 다 텄다. 
왜 하필 안암역일까. “다른 곳에 비해서 단속도 덜 오고 예전부터 노점이 있던 자리니까 들어오기도 쉬웠죠. 다른 데는 단속이 매일 서너 번씩 온다는데 여기는 하루에 한 번 정도 오니까.” 그는 며칠 전 단속에 적발돼 계도장을 받았다. 단속이 뜨면 그는 리어카를 들고 이동을 한다. 이동 중에는 단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속 이동을 하다 단속반이 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담당 공무원들은 단속 시 계도장을 발급하고 이동조치를 하고 있다. 계도장을 받고 사흘 안에 이동하지 않으면 리어카 강제수거가 원칙이지만 민원이 많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강제수거를 하지는 않는다.
그는 왜 노점상을 선택했을까. “뭐 다른 걸 하려고 해도 배운 게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이걸 하지. 먹고 살아야 되긴 한데. 예전에 푸드트럭도 잠깐 했는데 사람들이 맛없다고 안 먹더라고요. 호두과자는 복잡한 게 아니니까 하기 쉬워요.”
박 씨는 가락동에서 두 자녀와 아내와 살고 있다. 노점과 주말 꽃배달로 버는 한 달 수입은 350만 원 정도를 밑돈다. “경제적으로 그렇게 힘들지는 않지만 가장이잖아요. 애들 학원도 잘 못 보내주니까 그게 제일 미안하죠. 아내도 제가 돈 많이 못 갖다 주니까 계속 화를 내는 거겠지.”
지금 가장 바라는 게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장사 잘 되는 거죠. 단속 좀 덜 오고. 3월 끝나면 여름에는 오징어 기계 사서 행사 돌아다니면서 장사하려고요. 그리고 다시 겨울에는 여기로 오겠죠. 장사 잘 돼서 집에 돈을 많이 갖다 줬으면 좋겠어요.”
익숙한 동네가게가 된 법대 후문 ‘순대포터’
진병진(남‧65) 씨는 2002년부터 13년째 법대 후문에서 순대 푸드트럭을 하고 있다. 법후 자취생들에게는 ‘순대포터’로 불리며 진 씨네 순대포차가 온 것을 학생들이 서로 알려주는 ‘포터와썹(PoterWhatsup)' 앱도 생겼다.
▲ 법대 후문에서 13년째 순대 푸드트럭을 운영하고 있는 진명진(남.65) 씨. 사진|장지희 기자 doby@

그는 원래 20여 년 동안 통신 기술자 일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일의 능률이 떨어지자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았다. “전화국 직원은 아니고 건설업체 직원이어서 전봇대 일을 많이 했어요. 순발력이 필요한 일인데 나이가 먹으니까 떨어지더라고. 그래서 그만뒀어요.”
그는 통신업체 일보다 노점이 상대적으로 더 편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편한 걸 떠나서 통신 쪽 일은 날씨에 따라서 일이 일정치가 못해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어도 못했죠. 그런데 이건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할 수 있어요. 그 대신 밤에 일해야 하니까 잠을 못 자는 게 힘들죠.” 그는 보통 밤 9시에 법대 후문에 와 새벽 3시까지 장사를 한다. 강북구 번동에 있는 집에 가 씻고 밥 먹고 잠자리에 누우면 새벽 5시다.
진 씨는 어렸을 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남을 도와준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내 철칙은 한번 나한테 온 손님은 다시 내게 오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양도 많이 주고 맛있게 해주고 싸게 해주고. 내가 없이 살아서 남을 도와준 적이 없어요. 지금은 그렇게 쪼들리는 건 아니지만 도와줄 형편도 아니라 순대 한 개라도 더 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하지. 그러니까 마음이 좀 편해.”
“아저씨, 토종순대 하나랑 오뎅 2개요.” 얘기 도중에도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까지 계속해서 손님이 모여들었다. 수입이 궁금해져 조심스레 물어보니 그가 말하기를 꺼렸다. “손님이 많아서 많이 벌 것 같은데 돈은 생각보다 얼마 안 돼요. 방학 땐 형편없고 시험 기간엔 잘되고. 평균 150에서 200정도 버는 거 같아요.” 왜 사람이 더 많은 곳에서 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참살이길 같은 데는 주변 가게들이랑 갈등도 생기고 시끄러운 거 싫어요. 술 취한 사람들 오는 것도 싫고. 여긴 주택가고 조용한 게 좋아.”
13년째 장사를 하다 보니 단골도 많다. “졸업생들 왔다가 아저씨 아직도 계시냐면서 순대먹고 가지. 사법고시 붙은 학생도 가끔 왔다 갔어. 13년 됐으니까… 학교 근처니까 학생들이 자주 찾아줘서 좋지.”
밤 11시가 가까워졌지만 법대 후문 순대포차에는 학생들이 옹기종기 서서 순대를 먹고 있었다. 혼자 온 자취생부터 야식 거리를 사러 온 동네 아주머니까지 그들에게는 진 씨의 순대포차가 출출한 배를 달래주는 하나의 동네 가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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