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점 문제에서 자영업자의 영업권과 노점의 생계권은 가장 대립적인 권리다. 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은 이들의 상생을 이뤄낸 사례는 있다. ‘부평 문화의 거리’가 그 예다.
1998년도 당시 부평 문화의 거리엔 100여 개의 노점이 있었다. 처음 변화를 시도하게 된 계기는 ‘동네 만들기’였다. 당시 부평시장 상인회 회장이었던 김문곤(남‧58) 씨는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자는 기본 취지를 위해서는 노점 정리가 불가피했다”며 “처음에는 노점의 반대도 거셌다”라고 말했다. 270m의 거리에 100여 개가 있던 상황에 노점은 더욱 힘을 모았고 상인회 사람은 소수였다. 김 씨는 “당시엔 웬만해선 노점을 건드리기가 어려웠다”며 “가게 통유리가 돌을 맞아 깨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상인회는 구청과 함께 노점 정리에 들어갔다. 부평구청은 노점상들을 대상으로 재산세 조사를 시행해 기업형 노점과 생계형 노점을 구분했다. 김 씨는 “조사해보니 노점상 중 아파트 3채 가진 사람도 있었다”며 “그런 기준을 두니 100여 개의 노점이 48개로 줄게 됐다”고 말했다.
▲ 노점과 상권 가게가 깔끔하게 배치돼 있다. 사진|장지희 기자 doby@

노점 수가 줄자 동네 정비도 쉬워졌고 거리도 깔끔해졌다. 48개의 노점은 상속‧매매 금지를 조건으로 부평구청에 등록됐고 장사를 보장받게 됐다. 1998년부터 1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노점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나간 노점의 자리에는 한 평 공원을 조성하고 휴식공간을 만들면서 점차 동네가 안정화됐다. 상인회와 노점상 간의 신뢰도·친밀도도 조금씩 높아졌다. 오석준 부평 문화의 거리 상인회장은 “서로에게 남아있던 앙금이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없어졌다”고 말했다. 2007년 노점의 수가 20개로 줄어들자 상인회는 남은 노점상들을 부평 문화의 거리 상인회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명칭도 노점상에서 ‘가판대 회원’으로 바꿨다. 오 회장은 “모두가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구성원이라는 합의에 이르게 됐다”며 “상인회에서는 가판대 회원과 상인 회원이 공존하고 차별 없이 상생한다”라고 말했다.
노점상과 상인회의 상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함께 문화의 거리 발전에 서로 한 걸음씩 양보하고 협동했다. 대표적인 예로 상인회는 가판대 회원들에게 거리 정비를 위해 먹거리 노점을 문화의 거리 끝쪽으로 옮길 것을 부탁했다. 가판대 회원들은 논의 끝에 동의했고, 상인회는 정부에서 나온 문화의 거리 보조금으로 노점을 위해 비막이 지붕을 만들고 수도와 전기를 연결했다. 오 회장은 “서로를 잘 알고 조금씩 양보해 상부상조하고 있다”며 “가판대 회원분들 모두 사람이 좋으셔서 협조가 잘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상인회가 노점상에게 설치해준 비막이용 지붕. 사진|장지희 기자 doby@

현재 부평 문화의 거리에 남은 노점은 13개다. 상인회 측은 앞으로 문화의 거리 속 노점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계속해서 논의 중이다. 오 회장은 “거리 상권을 위해서는 적절한 수의 노점이 필요하다”며 “하지만 신규 노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중해야 하는 사안이기에 규칙을 정하는 것이 먼저다”라고 말했다. 작년 부평 문화의 거리는 정부가 지원하는 전국 야시장 공모전에 뽑혔다. 하지만 내부 사정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오 회장은 상생의 노하우로 업종의 특징과 오랜 시간을 꼽았다. 그는 “같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함께 장사해온 것도 중요하지만 가판대와 자영업자의 업종이 덜 겹치는 요소도 필수적”이라며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구조와 바탕 위에서 친밀도를 쌓은 것이 상생의 비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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