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중 이 달걀을 탁자 위에 세울 수 있는 분 계십니까?”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에 소개한 콜럼버스가 한 말이다. 그 후 그는 달걀 껍질을 깨고 깨진 부분으로 달걀을 세운다.
입학 시 주어지는 학번은 학교 내에서 개인을 식별할 때마다 사용된다. 그러면서도 학번은 쉽게 노출되기도 한다. 곽승찬(공과대 건축13) 씨는 “요즘 블랙보드에도 학번을 아이디로 쓰기에 학번 노출이 빈번하다”며 “일반 포털사이트 댓글의 아이디도 보호되는데 학번이 그렇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 학번에는 입학년도, 단과대학 및 학과/반, 일련번호가 표기된다. 사진 | 장지희 기자 doby@

학번은 입학년도, 소속 단과대학과 학과/반 그리고 일련번호로 구성된다. 하지만 본교 KU-KIST 융합대학원(원장=서상희)에선 학번의 일련번호를 입학생이 선택하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2013년 KU-KIST 융합대학원에서 시행된 이 제도는 유신열 KU-KIST 융합대학원 과장의 발상에서 시작됐다. 유 과장은 일련번호를 개인이 선택할 뿐만 아니라 입학년도와 소속 단과대학, 학과/반에 대한 정보가 포함돼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일련번호가 결정되는 것이 문제”라며 “개인 식별 그 이상의 정보가 담긴 학번이 불필요한 정보와 함께 노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무작위로 주어지는 일련번호
#1. A씨 학번의 일련번호는 36이다. 그는 일련번호를 따라 ‘뻔 선배’를 찾아봤으나 그의 ‘뻔 선배’는 학교를 떠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과 동기인 B씨는 ‘뻔 선배’로부터 전공서적과 강의자료 등을 제공받았다. 첫 수강신청 때도 ‘뻔 선배’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수강신청 방법이나 교양강의 등의 조언뿐만 아니라 본교 강의평가사이트(www.kuklue.net)의 아이디를 빌릴 수 없었다.
허지인(보과대 물리치료14) 씨는 뻔 선배가 없어 불편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허 씨는 “주변 동기들은 뻔 선배와 친해지며 대학생활에 잘 적응할 때 나는 그렇지 못해 소외받는 느낌이 들었다”며 “편하게 전공지식이나 대학생활에 대해 물어볼 뻔 선배가 없어 불편했다”고 말했다. 뻔 제도에 대해 유신열 과장은 “뻔 선후배는 학번으로 인간관계가 영향 받는 전형적 사례”라고 말했다.
학번의 맨 끝 두 자리인 일련번호는 무작위로 배정된다. 배옥미 학적수업지원팀 과장은 “일련번호는 전교생이 무작위로 프로그램을 통해 받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무작위로 배정된 일련번호라도 개인의 대학생활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유신열 과장은 많은 것이 타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문제로 꼽았다. 그는 “비록 무작위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학번을 타인이 결정한다는 것이 문제”라며 “학번은 과제를 할 때, 주변 친구들 등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유 과장이 학번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주도적인 대학생활을 할 수 있는 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학번을 스스로 선택하면 대학 생활의 시작부터 능동적이 될 것”이라며 “학번을 통한 뻔 선후배 대신 선후배 관계를 돈독히 할 다른 제도를 만들어야할 때”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진숙 문과대 학사지원부 과장은 “학번을 본인이 선택한다는 점은 학생에게도 긍정적 효과를 줄 것”이라며 “행정 상 절차가 더 생기겠지만 충분히 긍정적으로 검토해볼만 하다”고 말했다.
입학 당시 소속의 노출
#2. 세종캠퍼스 소속이 드러난 학번을 받은 B씨는 제2전공으로 안암캠퍼스 국어국문학과에 합격했다. 어느 날 전공수업시간에 출석을 부르던 한 교수는 출석부에 표기된 학번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자네는 세종캠퍼스에서 왔구만.”
세종캠퍼스 독일문화정보학과를 재학하다가 안암캠퍼스에서 서어서문학과를 복수전공하는 이인영(인문대 독문08) 씨는 “주변에 학번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학생이 많다”며 “팀 과제 당시 학번을 보고 같은 팀으로 활동할 것을 거절당한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학번을 통해서는 개인의 모든 소속을 알 수 있다. 단과대별 번호, 뒷자리 일련번호의 범위에 의해 캠퍼스, 단과대학, 과/반 소속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유신열 과장은 소속이 노출된 후 그것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의 여부는 2차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노출하고 싶을 때 노출하는 것이 개인정보”라며 “영향을 주는지의 여부보다는 정보노출 자체에 초점을 맞춰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최성수 공학대학원 과장은 학번에 소속을 넣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자동차 번호판 관련 사례를 들었다. 최 과장은 “옛날엔 자동차 번호판에 ‘경기’ 등 지역을 기재해 이사할 때마다 바꿨어야 했다”며 “이런 불편 때문에 자동차 번호판에서 지역을 없앤 것처럼 제2전공을 졸업요건으로 요구하는 현재는 학번으로 소속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입학년도의 의미
#3. 10학번이고 4학년인 C씨는 2학년이 주로 듣는 수업을 들었다. 2학년 당시 부득이하게 수강신청을 하지 못해 이번에 이 수업을 처음 듣는 것이었다. 팀 발표자로 나선 그가 ppt 첫 페이지로 학번을 밝히자 한쪽 구석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다. “저 선배는 재수강이신가봐.”
여태 학번으로 선후배를 구분했지만 학번에 입학년도를 쓰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전영민 경영대 학사지원부 과장은 학번에 입학년도가 표기되는 것에 행정적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현 상황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 과장은 “사실 학번에 입학년도를 기재하면 졸업요건 등을 확인할 때 편리한 측면이 크다”면서도 “하지만 현 상황에서 입학년도를 표기한다는 것이 개인정보의 유출이기에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번에 입학년도를 표기해야한다는 최성수 과장은 사회적 합의 측면에서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 과장은 “대학사회에서 학번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선후배간 연결고리란 측면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작은 변화부터 사회적 합의를
학번에 △입학년도 △출신학과/반 △일련번호를 기입하는 것에 대해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안보영(정경대 통계11) 씨는 학번 체계를 바꿔서 오는 불편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학번 자체가 노출되는 경우가 크지 않다고 생각해요. 또 학번을 알아볼 수 없다면 입학년도나 소속에 대한 추가정보를 요청해야 해 불편을 겪을 것 같아요.”
하지만 권순민(문과대 사회13) 씨는 학번에 입학년도와 출신학과/반을 기재하는 것은 학번이 곧 신분번호 혹은 소속번호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권 씨는 “입학년도나 소속을 넣는 것은 행정적 편의를 위해서일 것이라 납득할 수 있지만 입학년도나 소속은 개인이 원치 않는 위계, 권력관계를 더 드러나게 한다”고 말했다.
유신열 과장은 학번이 정보를 노출할 수 있다는 것을 공론화해 논의하는 것이 고정관념을 깨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입학하며 자연스레 받는 학번이 정보를 노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자체로 고정관념을 깨는 일”이라며 “고려대에서 이 논의가 시작돼 사회로 확산된다면 더 큰 논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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