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해제에서 이 책이 한국에서 오해받기 쉬운 책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제목만 보면 ‘힘들어도 행복을 추구하는 젊은이가 있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 않는가? 이것은 ‘고난을 긍정적으로 이겨 내는 스토리’를 과하게 좋아하는 한국 사회의 특징과 무척이나 어울린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에 대한 절망감에 행복해지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불평 좀 하지 마라’면서 권장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이 나오고 몇 달이 지난 후 나는 모 기자로부터 전화가 받았다. “요즘 일본의 ‘사토리세대’를 조선일보에서 ‘달관세대’로 응용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혹시 예상을 하셨던 것입니까?”
달관세대. 이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란 말인가? 특정집단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통계적으로 다음의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절대적인 수치 자체가 높아야 한다. 이는 그 자체가 ‘전형성’을 지니니까 별다른 논의가 필요 없다. 아울러 ‘달관세대’가 이를 충족시킬 리도 없다. (이것은 일본의 ‘사토리세대’도 마찬가지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취업난과 그 이후 생존경쟁에서 ‘득도’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둘째, 수치가 ‘낮더라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살률’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사람은 살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그 ‘역’선택은 쉽지 않은 결정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낮은 수치’라도 ‘대단한’ 수치가 될 수 있다. ‘달관세대’도 우선적으론 이 조건을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가 절망적이면 개인도 절망적이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역’반응인가? 그러니 그들의 특징을 가지고 ‘청춘세대’를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인가 ‘다른 지형이 등장하고 있음’ 정도로는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세 번째다. 만약 통계적 수치가 시간의 변화에 상관없이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에 굳이 사회적 해석을 첨가할 이유가 없다. 앞서 언급된 두 조건이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사회적 의미는 떨어진다. 예를 들어 ‘당신은 자녀를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일정할 수 있으니 그 수치에서 ‘사회적 맥락’이 발견될 리 없다. 또 자살률의 수치가 늘 일정하다면 ‘자살성향으로 지닌 채 태어나는 사람’ 정도로 이해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특정한 시기를 거치면서 자살률이 급증한다거나, 아니면 유독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그 수치가 더 높다면 여기에는 어떤 ‘사회적 이유’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두 번째를 충족한 ‘달관세대’가 세 번째를 완성하려면 ‘과거에는 없었던’ 일부라는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과연 그런가?
언론에서 제시한 ‘달관세대’는 그 명칭의 현학성에 비해 내용은 너무 빈약하다. ‘욕심 부리지 말고 만족하고 산다’가 처음부터 끝이다. 이 이야기가 유의미성을 확보하려면 예전에는 없었던 존재였고 시대의 특징과 함께 ‘등장한 사례’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급여는 적지만 불만은 없다’는 사람들은 예전부터 늘 있어왔던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일부’의 전형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즉, ‘달관세대’는 어느 시대나 일정비율 정도를 지니는 소수의 누군가를 ‘시대의 특징’으로 포장한 것이다. 이런 시도를 한 조선일보의 이유는 명백하다. 달관세대의  사례는 ‘만족하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너는 맨날 사회 탓만 하느냐!’는 논리로 빠질 개연성을 충분히 제공한다. 그럴수록, ‘성형수술’이 포함된 ‘취업9종 세트’라는 초인간적인 취업준비를 해야 하는 수많은 청춘들의 ‘엄청난’ 고충은 사회적인 의제로 진화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가 지속될수록’ 개인들은 ‘취업9종 세트’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모두가 받아들이니, 그 다음은 ‘취업10종 세트’ 아니겠는가.

▲ 오찬호 연구원

오찬호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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