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이 지난 시점에도 우리는 ‘잊지 말자’고 외친다. 세월호는 왜 중요할까. 이충진(한성대 교양교육원) 교수는 세월호는 국가적 사고를 넘어 한국사회애서 하나의 상징을 갖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월호에는 현재 한국사회의 부정적인 모습들이 집약되어 있어요. 한국사회의 부패한 모습과 그 속에서의 개개인의 인생관이 담겨있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좀 더 나은 공동체, 인간의 삶을 원한다면 세월호에 주목해야해요.”

▲ 6일 낮 자원봉사자가 시민에게 시행령 폐기 서명을 받고있다. 사진│장지희 기자 doby@

그는 또한 한국 사회에서 학생은 철저한 사회적 약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본인이 약자라는 것에 대해 의식이 없어요.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와는 상관없이 한 개인으로서만 살아갈 생각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와 같은 일을 자신의 일과는 상관없다고 여겨요.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사회, 정의 ,연대, 위로’ 이런것들을 진정성있게 말 살 수 있어요.”

그날 이후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광화문 앞의 노란 추모공간은 변하지 않았다. 유가족, 자원봉사자들이 ‘진실규명’을 외치며 세월호 추모공간을 지키고 있다. 2015년 4월 광화문 광장의 낮과 밤은 어떤 모습일까.

낮 12시, 조금은 무심한 차 소리와 수많은 사람의 통화 소리, 발걸음 소리, 이야기 소리, ‘띠띠띠’ 신호등 소리가 울린다. 그 속에서 “서명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라는 목소리가 균형을 깬다. 지나가던 고등학생이 친구에게 물었다. “야 너 서명했냐?” 전우진(남‧19) 씨는 대답 대신 서명을 하러간다. 서명 후 세월호 인양 스티커와 노란색 리본을 받아갔다. “졸업사진을 찍으려고 왔다가 추모를 하려고 들렸어요. 제가 지금 고3이니까, 저 사진 속에 있는 단원고 학생이랑 친구예요.” 이순신 장군 동상 앞으로 큰 노란 리본과 작은 소망이 담겨있는 여러 개의 리본이 보였다. 수많은 노랑색 리본 사이로는 아직 찾지 못한 아이들, 어른들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니 ‘세월호 300일의 기록을 담은 광화문 사진전’이 보였다. 사진전은 2014년 4월 16일이라는 숫자와 기울어진 세월호 사진으로 시작했다. 참사 첫째 날, ‘구조자 명단을 몇 번이나 다시 읽지만, 우리 아이, 우리 가족의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글과 함께 구조자 명단 앞에서 간절하게 이름을 찾는 가족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보였다. 4월 27일, ‘뺨을 부풀려 셀카를 찍으며 즐거워야 할 아이들이, 아버지가, 어머니가, 너무 많은 사람이 사각의 사진틀 안에 갇혔다’라는 글과 함께 수 백 명의 영정사진들이 가득 찍힌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사진전은 세월호의 아픔과 유가족이 걸어왔던 300일의 시간을 담으며 끝이 났다. 그리고 그 옆에는 너무도 예쁜 아이들이 앳된 얼굴로 웃고 있는 사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 단체 사진에서 누군가는 브이를 하고, 누군가는 옆에 친구와 함께 하트를 만들고, 누군가는 두 손을 볼을 감싸고 있었다. 이 사진은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1학년 때 단체 사진이었다.

▲ 8일 밤 명지대 학생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장지희 기자 doby@

광화문 광장에는 12개의 텐트가 줄지어 있었다.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김재현(여‧39) 씨는 아침 9시부터 오후 11시까지 광화문 광장을 찾아 리본을 만들고, 유가족들과 함께 서명운동을 벌인다고 했다. “봉사활동 한 지 5개월 정도 됐어요. 아무래도 힘들죠. 하지만 제 아들 생각하면서 해요. 안전한 나라에서 살게 해주고 싶어서요.” 이순신 장군을 지나 세종대왕 앞으로 가니 바닥엔 비닐이 깔렸고, 그 위에는 담요, 물, 배낭, 외투가 놓여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416시간 농성장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그렇게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오늘도 故 김유민의 아빠 김영오(남‧46) 씨와 시민들이 앉아있었다. “여기서 먹고 자고 하는 거 육체적으로 하나도 안 힘들어요. 하지만 국민들이 오해하고 멀어지는 게 아쉬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시행령 폐기해달라고. 사후 대책 제대로 해달라는 것뿐이에요.”

세종대왕 동상을 조금 지나니 또 하나의 비닐 막 공간이 나왔다. 이곳에서는 故 이민우 아버지 이종철(남‧48) 씨가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종철 씨도 바닥에서 먹고 자며 농성을 이어나간다. 그는 진상규명을 할 때까지 이곳에서 뼈를 묻을 것이라고 말했다. “살고 싶은 마음 전혀 없어요. 내 아들 죽은 이유 하나 듣고자 끝까지 하는 거예요.” 그는 세월호 문제에 있어서 대학생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요즘 대학생들은 취업하느라 바쁜지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못 두기도, 안 갖기도 하는 것 같아요. 세월호 행사에 대학생이 제일 많이 온 게 500명이에요. 제가 너무 답답해서 인터넷에 우리나라 대학생이 몇 명이 되나 찾아봤어요. 한 300만 명 정도 되더라고요. 이 나라는 우리가 아닌 지금 청년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에요.”

4일부터 5일까지 유가족과 시민들은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 철회’와 ‘세월호 온전한 인양 결정 촉구’를 요구하며 안산부터 광화문까지 도보행진을 진행했다. 그 길의 마지막 도착지인 광화문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은 촛불집회 시간을 가졌다. 오후 5시, 촛불집회에는 250명의 유가족과 50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도, 광화문 광장은 꽉 찼다. 사람들이 손에는 ‘언제나 함께 있을게’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컵과 촛불이 있었다. 지난 2일 삭발을 한 유가족은 머리에 두건을 싸맨 채 비닐에 쌓인 영정사진을 들고 앉아 있었다. 유가족들은 조금씩 내리는 빗방울에 하염없이 영정사진을 닦고 또 닦았다.

촛불집회에서는 고인들을 기르는 추모시간을 갖고,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철폐와 진실규명 촉구를 다짐했다. 강미경(여‧36) 씨는 한 손에는 아이 손을 잡고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집에만 있기가 정말 미안해서 나왔어요. 지금 안고 있는 이 아기가 제 배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어요. 우리 아이의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촛불집회가 끝난 뒤 유가족은 한 줄로 서서 시민들과 인사를 나눴다. “잊지 않을게요. 1년 동안 함께해주신 그 마음 잊지 않을게요.” 유가족들이 건넨 손에 시민들은 4월 16일을 잊지 않겠다고 답했다. 도보행진으로 유가족들의 걸음은 지쳐 보였다. 누군가는 우산을 지팡이로 사용하며 겨우 마지막 발걸음을 옮겼다. 서명숙(여‧45) 씨는 유가족에게 인사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작년에 제 아들이 고2였어요. 그리고 4월 16일 며칠 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고요. 제 아들이 그 배에 타 있었을 수도 있어요. 이건 유가족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에요.”

마지막으로 지나가던 유가족 중 한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아무런 말도 없이 한 시민이 달려가 안았다. 유가족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직도 저는 우리 아들 사진만 보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힘들면 실종자 가족들은 더 힘들어요. 아직 사망신고도 못 했어요. 그러기 위해선 친구들이 다 와야 해요. 힘이 되어주세요.”
 
유가족 모두가 떠나고 난 뒤, 누군가는 울면서 자리를 떠났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성였다. 그렇게 시민들도 떠나고 난 뒤,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는 다시 비닐이 깔렸다. 오늘도 그 위에서 밤을 지새울 유가족과 시민이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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