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선체에 있던 476명의 승객 중 295명이 사망했고 9명이 실종됐다. 사고발생 이틀 후 세월호는 해상 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1년 뒤, 유가족은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 시행을 요구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이 아직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월호 특별법 제정 이후를 故 남지현 학생의 언니인 남서현(여‧25) 씨와 시간순으로 따라가 봤다.

▲ 일러스트│김채형 전문기자

- 2014년 11월 7일 세월호 특별법 제정안 통과
“특별법이 특례법이 됐다. 우리가 요구하지도 않은 이야기들로 특별법이 왜곡되는 게 가슴 아팠다. 하지만 600만 명에 달하는 국민의 지지서명을 얻고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됐다. 우리에게는 많은 것을 포기한 특별법이었다. 그래도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지면 진상규명이 이뤄질 것이라고 믿었다.”

국회에서 지난해 11월 7일 참사 205일 만에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안(세월호 특별법)’ 제정안이 통과됐다. 당시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251명 가운데 찬성 212명, 반대 12명, 기권 27명으로 가결됐다.
세월호 특별법은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를 설치해 유가족이 추천한 조사위원장을 비롯한 조사위원 17명이 1년 6개월 동안 진상조사 활동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 2014년 11월 11일 ‘세월호’ 실종자 수색 중단
“정부는 우리에게 수색중단은 곧 세월호 인양이라고 말했다. 진도에서 잠수부들의 위험한 모습을 보며 눈물을 머금고 수색중단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바로 정부의 태도는 바뀌었다. 인양은 ‘검토’만 하겠단다.”

세월호 사건의 실종자에 대한 수색이 209일 만에 중단됐다. 정부는 지난 10월 중순부터 세월호 선체의 붕괴가 지속되고 수온이 급격히 내려가는 등 수색 조건이 나빠져 ‘세월호’ 실종자 수색이 어렵다고 밝혔다.
당시 세월호 침몰 사고 범정부사고대책본부장인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은 후속 활동과 관련해 “인양 등 선체 처리에 관해서는 해역 여건, 선체 상태 등에 대한 기술적 검토와 실종자 가족, 전문가 등의 의견 수렴과 공론화 과정을 거쳐 적절한 시점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실종자 가족은 선체 수색중단을 받아들이고 실종자를 찾을 새로운 대책을 내놓을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 2015년 1월 26일 세월호 인양 촉구하며 20일간 도보행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걷고 또 걸었다. 이렇게라도 ‘알리자’ 그 마음 하나뿐이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온전한 선체 인양으로 침몰 사고의 진상을 규명할 것’을 촉구하며 도보행진에 나섰다. 이들은 20일간 450㎞를 걸어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 도착했다. 4·16가족협의회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지난해 11월 수색 종결 후 온전한 선체 인양을 믿었는데, 이제 와 시간을 끌고 인양 반대 움직임을 보이는 정부와 여당의 태도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 2015년 3월 27일 세월호 특위 조직·예산 대폭 축소
“카톡이 울렸다.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이 나왔단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절대 시행되면 안 된단다. 인터넷을 찾아가며 하나씩 공부했다. 여태까지 나를 포함한 유가족 형제, 자매들은 항상 숨죽여왔다. 더는 숨죽일 수 없었다.”

정부가 3월 27일 ‘4·16 세월호 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시행령’을 공포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유가족은 세월호 진상조사를 위해 꾸려진 특조위의 역할과 기능을 대폭 축소하는 시행령안이라며 철회를 요구했다. 이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박주민(남‧42) 변호사는 “이번에 나온 특별법 시행령안은 특조법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진상규명을 위해 특조위가 조사대상인 정부부처로부터 독립돼야 하지만 시행령에 따르면 조사대상이 되는 정부부처가 파견하는 공무원들이 주요보직과 많은 숫자를 차지해, 독립 조사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업무 범위에 있어서도 시행령은 기존의 특별법의 진상규모 범위보다 줄었다고 덧붙였다. 박 변호사는 “특별법에서는 ‘원인 규명’과 ‘구조, 구난 작업과 정부 대응의 적성 성에 대한 조사’였지만 이번 시행령은 정부가 세월호 사고에 대해 조사한 발표 결과에 대해서만 그 사실 여부가 맞는지 따져보는 것”이라며 “사건 자체에 대한 진상규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 2015년 3월 30일 광화문서 ‘416시간 농성’ 돌입
“시행령을 양보하면 진상규명은 불가능하다. 마지막 절벽 끝이라고 생각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입법 예고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의 폐기와 세월호 선체 인양을 촉구하며 3월 30일부터 4월 16일까지 ‘416시간 연속 농성’에 들어갔다 4·16세월호 참사 가족대책협의회와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는 이날 낮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조사위원회의 권한을 무력화하는 해양수산부의 엉터리 시행령안을 폐기하라”고 촉구했다. ‘416시간 연속 농성’을 선언한 시민사회단체들은 매일 저녁 광화문광장에서 촛불문화제를 연다.

- 2015년 4월 1일 세월호 희생자 배‧보상금 발표
“시행령이 발표된 다음 날, 온갖 포탈에는 우리가 8억 원을 받는다는 기사가 도배됐다. 우리는 돈 달라고 한 적이 없다. 진상규명이 우선이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엄청난 돈을 받고도 시위를 하는 사람이 됐다.”  
 
1일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보상금 산정 기준과 예상액을 발표했다. 단원고 학생의 배‧보상금은 총 8억 2000만 원이었다. 하지만 이 중 3억은 국민성금이고, 1억은 여행자 보험금이다. 그리고 나머지 3억은 학생들이 살아 있을 경우 법정 정년까지 42년간 벌었을 예상소득, 지연손해금 2400만 원, 위자료 1억이다. 오세범(남‧60) 민변 변호사는 “언뜻 보기에는 유가족들이 많이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의 예상 소득 또한 공사장 인부 임금을 기준으로 정해졌다”며 “위자료 역시 일반 교통사고와 같은 수준일 뿐”이라고 말했다.

- 2015년 4월 2일 유가족 52명 삭발
“오늘은 2014년 4월 16일 이전의 삶과 비교해 가장 많이 달라졌던 날이다. 4월 16일 전 우리는 아주 조용한 마을에 조용한 시민이었다. 이전의 삶을 전부 버린다는 생각으로 삭발했다. 국민들이 꼭 좀 알아줬으면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몇 억의 돈이 아니라 진상규명이라는 것을.”

유가족들은 2일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 즉각 폐기, 세월호 선체인양 공식선언 때까지 배상·보상 절차 전면 중단 등을 정부에 요구하며 삭발을 했다. 삭발한 이들은 모두 52명이다. 48명은 광화문광장에서, 아직 전남 진도를 떠나지 못한 이들 4명은 팽목항에서 머리를 밀었다. 유가족 이종철 (남‧48) 씨는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진상규명을 원한다”며 “왜곡되는 우리의 뜻을 바로잡고, 진상규명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삭발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부디 국민이 이 사실을 알아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2015년 4월 4일 1박 2일 시민들과 도보행진
“부모님은 상복을 입고 영정사진을 들고 도보행진을 시작했다. 동생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나 역시도 너무 힘들다. 하지만 함께해주시는 시민들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 진도체육관에서 항상 휴지통을 비워주는 아이가 있었다. 아주 고맙고 마음이 아팠다.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 나아갈 용기가 생긴다.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일으킨다.’ 아주 사소한 움직임이 내가 버틸 수 있게, 움직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내가 움직인다면 진상규명도 반드시 이뤄질 것으로 생각한다.”

세월호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이 정부가 입법 예고한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이 모법인 세월호 특별법을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유가족들은 시행령안 철회를 요구하는 1박 2일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 결정 촉구 국민도보행진’에 나섰다. 도보행진은 첫날 안산에서 시작해 그 다음날 광화문까지 이어졌다. 4월 5일 광화문에서는 국민들과 함께 촛불집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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