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어느 고등학교 생물시간이었다. 선생님은 고등학교 생물과 중학교 생물은 천지 차이여서 그걸 아무리 설명해봤자 못 알아들으니 <OO생물>이라는 참고서를 사서 무조건 외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시험성적이 80점 이하인 학생들은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를 5대씩 맞을 것이라는 엄포가 떨어졌다. 필자는 죽어라 참고서를 외운 덕분에 엉덩이가 부어오르는 재앙은 피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뭔 소리인지는 여전히 모른 채 졸업했다.

▲ 라파엘로의 작품 아테네학당 중앙에 아리스토텔레스(우), 플라톤(좌)가 토론하며 걷고 있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이 가르쳐 준 내용을 절대불변의 진리인 양 신봉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독창적인 철학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인류 지성사의 발전은 늦춰졌을 것이다. 사진출처|위키백과

대학에 입학한 후 <자연과학개론> 시간에 생물학과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비로소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참고서의 내용이 나의 머릿속에서 꿰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대학에서 배운다는 것이 뭔지 어렴풋하게나마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필자의 경험담은 대학에서의 배움이 그 이전의 것과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초중고교에서는 “왜?”라는 물음을 유보시킬 때가 많다.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이 전제된 채 그것을 얼마나 많이, 얼마나 정확하게 습득해서 대학 입시를 치르느냐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교과서의 내용이 틀릴 수도 있고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대학에서의 배움은, 인간의 지식이 오류가능하기에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이론도 뒤집어지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기존의 지식을 맹신하는 태도를 버리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적인 역사 못지않게 철학사 역시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대표적인 예로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형이상학 체계를 구축한 아리스토텔레스를 들 수 있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이 가르쳐 준 내용을 절대불변의 진리인 양 신봉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독창적인 철학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인류 지성사의 발전은 늦춰졌을 것이다. 반면에 플라톤은 자기의 철학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제자를 가르쳤다는 점에서 뛰어난 스승이라는 칭송을 받기에 합당하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비판적 시각이 가능할까? 우선 제자의 입장에서는 주체적으로 사고하겠다는 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내가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더라도 나 역시 스승을 비롯해서 그가 소개하는 사람들과 대등하게 생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자각과 자존감이 있어야 그들을 비판할 엄두를 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학생들의 학문적인 자존감을 키워주지 못하는 교육체계를 구축해 왔다. 열악한 교육환경 탓일 수도 있고, 수직적인 지휘체계에 따른 상명하복을 강조한 일제와 군사정권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또한 경전의 글자와 구절을 해석하는 데에 주력했던 서당식 교육법의 유산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더 이상 이런 틀에 속박되어 사유의 노예로 살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런 노예는 우리 학계에서 점차 도태되는 추세에 있다. 따라서 대학에서는 자기가 사고의 주체이며, 인간이 만든 모든 이론에는 허점이 있을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접근하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비판하기 위해서는 비판의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주장이나 이론에 대해 문제점을 찾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판적 사고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존의 지식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무술을 배우러 도사를 찾아갔더니 하늘을 훨훨 날고 단칼에 적을 베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는 않고 여러 해 동안 장작 패고 물 긷는 잡일만 시키더라는 이야기는 무협소설의 단골 메뉴다. 비록 이것이 소설이나 영화의 한 대목이지만 학문의 세계에도 해당된다. 입력된 것이 없으면 출력도 없듯이 기존의 지식체계를 습득하는 인고(忍苦)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예리한 비판의 칼날을 휘두를 수 없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어떤 주장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그 주장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비판적 사고력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수용하는 열린 사고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며,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려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대학은 한 사회 내에서 사상의 자유와 다양성이 극대화되고 보장되는 공동체이기에 학생들은 대학에서 이질적인 세계관의 공존을 체득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자기와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을 걸핏하면 종북세력으로 매도하거나 인신공격을 가하는 일부 정치인이나 언론인은 대학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례로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미국 대학생들은 대부분 부모를 떠나 기숙사나 캠퍼스 부근에서 사는 덕분에 저녁 시간에 많이 열리는 다양한 강연회나 모임에 참석할 수 있다. 9 ․ 11테러가 발생한 해에 프린스턴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었던 필자는 그 사건과 관련해서 여러 형태의 강연회가 열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학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직 CIA 요원도 와서 강연하는 것을 보면서 다양한 시각을 접할 기회가 학생들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자 컬럼비아대학 교수가 부시 정권의 결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게재했고 보수 진영에서는 이 교수를 연일 성토하면서 그에 대해 제재를 가하라고 대학을 압박했다. 하지만 그 대학 총장은 그런 압력을 일축하여 외신을 탄 적도 있다. 이것은 대학이 다양한 이념과 가치가 공존하고 상호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지성의 용광로가 되어야 하고, 학생들은 거기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와 관점을 배워야 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끝으로 대학에서는 존경받는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 과거에 비해 대학이 대중교육기관이 되는 경향이 강해졌지만, 대학이 우리 사회의 리더를 양성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리더십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리더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회나 집단은 수많은 시행착오의 대가를 치르느라 불행할 수밖에 없기에 대학은 학생들이 리더십을 배우는 마당이 되어야 한다.
논어에서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고 했다. 자신의 사욕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리더의 자격이 없다. 대학시절에 옳고 그름을 따져서 행동하는 법을 배우고 사회적 약자들과 더불어 사는 길을 모색하는 의식을 갖추지 않으면, 존경받는 리더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처럼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들이 우리 사회의 리더가 되는 일은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제국에서 개선장군이 행진할 때에 노예로 하여금 그의 뒤에서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외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통해 인격적으로 원숙하고 겸허한 리더가 되는 길, 이것 역시 대학에서 배워야 할 과제다.

하종호
문과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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