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University of Califonia, Berkely, 버클리대)에는 교수가 아닌 학생이 가르치는 강의가 있다. ‘디캘(Democratic Education at California)’이라 불리는 이 강의는 학생이 강의계획서를 만들고 지도교수의 허가를 받으면 원하는 주제로 강의를 개설할 수 있다. 모든 강의가 학점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매년 꾸준히 학생들이 수강 중이다. 한국에는 디캘처럼 학생이 자율적으로 수업을 만들고 듣는 대학 수업이 없을까.

9일 목요일 오후 6시 ‘동아시아 국가의 헌법 연구’를 주제로 학생자율세미나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서울대 한 강의실을 찾았다. “지난 3월, 김영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우리나라에 공무원에 대한 포괄적 부패방지법이 생겨났습니다.” 강의실을 들어서자 강단에서 한 여학생이 발표하고 있다. ‘공무원 부패방지법제에 대한 고찰’이라 쓰여 있는 스크린 앞쪽에는 20여 명의 학생이 사뭇 진지하게 발표를 듣고 있다. 보통 수업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강의실에는 교수가 없다. 발표가 끝나자 학생들끼리 자연스럽게 발표에 대해 질문을 한다. ‘반장’으로 보이는 한 학생의 리드에 팀을 나눠 의견을 나눈다. 팀에서 나온 의견을 전체적으로 논의한다. 수업은 원래 끝나는 시간을 넘어서야 끝났다.
서울대 규장각에선 또 다른 세미나 수업이 진행 중이다. ‘한국음악과 문화’라는 수업에서도 마찬가지로 교수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학생들끼리 자유롭게 제례악에 관한 전시를 관람한다. 다음 주에는 이날 관람한 것들을 토대로 학생들끼리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서울대는 2007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학생자율프로그램(Student Directed Education: SDE)’이라는 새로운 수업방식을 선보였다. 학생자율프로그램은 학생 스스로 탐구하고 싶은 주제에 대해 주도적으로 강좌를 계획하고 개설할 수 있다. 서울대 기초교육원 박진아 씨는 “대학은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고 싶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나 출현한 공간”이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관심과 필요로 보다 주도적으로 학문을 탐구하는 자세와 역량을 갖추고, 대학을 역동적인 학문탐구와 교육의 장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학생자율프로그램은 ‘학생자율연구’와 ‘학생자율세미나’로 구성된다. ‘학생자율연구’는 3명의 학생이 탐구하고 싶은 주제로 한 학기 동안 논문을 쓰는 과정이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학생들이 졸업요건으로 수강해야 하는 강좌이지만, 원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학생자율세미나’는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는 학생이 직접 강의를 계획해 개설하면 원하는 학생들이 신청해 함께 수업을 해나가는 방식이다. 두 수업은 교양과목으로서 각각 2학점·1학점이 학점으로 인정되며, 평가는 P/F로 이뤄진다. 평가는 주로 출석에 따라 달라지는데, 출결도 학생들이 서로 자율적으로 체크한다.
학생자율프로그램 강좌 주제는 독특하고 다양하다. ‘밥약(학기 초 선후배간의 밥약속)의 매커니즘과 효과’, ‘안티패션의 변화 양상’,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 공부한다’ 등이 그 예다. 수업을 개설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원하는 교수를 지도교수로 정할 수 있다. 지도교수는 수업이 잘 이뤄지도록 지도를 해줄 뿐 직접 수업에 관여하진 않는다. 학교는 수업을 위해 필요한 경비를 지원해주고, 학생은 수업 후 연구일지를 매주 올려야 한다. 2007년 겨울계절학기부터 시작한 학생자율프로그램은 매학기 보통 20팀이 만들어져 교수와 학생의 호평 속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학생들이 계획서를 제출하고 심사에서 통과하면 강의가 개설이 돼 관심이 있는 학생 누구나 신청해서 수업을 같이 꾸려나갈 수 있다. 계획서 통과 기준은 주제가 전공 교과목이나 기존 강의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학제성, 통합성, 다문화이해성, 세계연계성, 시의적절성, 창의성 등과 관련돼야 한다.
직접 수업에 참여한 학생과 지도교수로 참여한 교수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한국음악과 문화’ 학생자율세미나 수업을 계획한 김성윤(서울대 국악이론10) 씨는 “4년 동안 전공을 배우면서 깊은 공부를 하고 싶었다”면서 “교수님이 나서서 챙겨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찾고 공부해야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고, 졸업 후 진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 국가의 헌법 연구’ 세미나를 수강하는 윤수정(서울대 불어교육12) 씨는 “주제도 직접 선정할 수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서 좋다”며 “그러면서도 교수님의 피드백도 받을 수 있고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수업이다”고 말했다.
직접 지도교수로 참여한 강광문(서울대 법학과) 교수는 “일방적으로 강의할 때보다 학생들의 욕구가 강해서 뭘 해도 더 잘한다”면서 “한국 수업방식은 개개인의 개성을 무시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 수업을 통해 학생들 스스로 본인의 능력과 창의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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