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 때문에 여자친구랑 헤어졌어.” 대학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연애의 끝이다. 롤(LoL)이라고도 불리는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라는 게임은 2012년 국내에 출시돼 현재 147주 동안 PC방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사용자도 많아 주변에서 롤 한다는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롤 때문에 싸우는 연인, 롤 때문에 빚어지는 갈등. 롤은 대학생의 인간 관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롤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롤에 죽고 롤에 사는 플레이어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롤의 헤비유저(heavy user)인 본교 게임동아리 Deluxe의 학생 10명과 인터뷰 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롤을 바라봤다.

▲ 사진│장지희 기자 doby@

게임 내의 계급, 랭크 제도
또 승급전에 실패했다. 초록 화면에서 붉게 빛나는 ‘패배’ 두 글자는 게임 하기 전 보다 외려 더 짜증나게 만든다. 이럴 거면 차라리 게임을 하지 않는 게 나을 뻔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손가락은 ‘한 번 더 하기’버튼으로 향한다.
롤의 랭크게임 제도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랭크는 실력을 평가하는 단 하나뿐인 지표다. 게임에서 발언의 공신력도 랭크를 근거로 판단된다. 랭크는 게임 내 발언의 영향력과 비례한다. op.gg(전적 검색 사이트)에서 아이디를 검색하면 랭크가 바로 나오기 때문에 랭크를 숨길 수도 없다.

‘랭크 게임’은 게임 내 플레이어의 등수를 결정하는 시스템이다. 플레이어의 점수를 통해 가장 높은 챌린저부터 최하위의 브론즈까지 ‘티어’가 정해진다. 서혁진(경영대 경영14) 씨는 티어를 ‘이마에 성적표를 붙이고 다니는 것’으로 표현했다. “랭크게임은 계급제도를 게임으로 옮겨놓은 거예요. 랭크로 무시당하기도 하고, 찬사받기도 하죠.” 박경민(공과대 전기전자11) 씨는 ‘랭크 게임은 한국 사회의 단면’이라고 했다. “똑같이 잘못을 해도 브론즈같이 낮은 티어는 엄청 욕을 먹는데 비해, 플래티넘같이 높은 티어는 ‘그럴 수 있지’라고 반응해요.”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상공간에서 지위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장주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 소장은 게임을 ‘가상공간’으로 분류하는 것부터 옳지 않다고 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게임 속 세계는 또 하나의 세계라는 표현이 적합합니다. 심리적 경험측면에서 게임과 일상은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죠.” 한민(문과대 심리학과) 교수는 ‘랭크 게임’을 한국의 권위주의적인 문화가 투영된 결과로 봤다. “위계나 서열, 권위주의적인 요소가 게임에 반영됐다. 취업 준비, 고시 준비 등으로 생긴 현실의 보상 결핍을 게임에서의 계급 제도를 통해 대리적으로 충족받을 수 있다.”

양날의 검, 채팅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정글에 매복해있었다. 1분 53초, 갑자기 상대 플레이어들이 미니맵에 나타났다. 제일 바깥쪽에 숨어있었던 나는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진영의 몬스터를 상대 팀에게 뺏겨버렸다. 그 와중에서 우리 팀의 정글러가 죽으며, 적의 원거리 딜러는 두 명을 연속해서 죽이는 더블 킬(Double Kill)을 했다. 우리 팀 정글러는 그때부터 나와 원거리 딜러에게 채팅으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나미랑 베인(원거리 딜러 캐릭터) 극혐이네’
‘나미 엄마 없냐’

롤에서 이런 플레이어를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정수(문과대 서문14) 씨는 채팅으로 부모님의 욕을 하는 플레이어를 만난 적이 있다. “욕하는 플레이어를 고소해본 적이 있어요. 욕을 다 캡쳐해 경찰서에 보냈는데,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려면 다수의 사람이 나를 지칭하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개인 채팅은 공중성이 없어서 신고를 못 한다고 했어요. 대신 경고 조치는 했어요.”
채팅을 스트레스를 푸는 창구로 보기도 했다. 임창균(경영대 경영12) 씨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요소가 채팅밖에 없다고 봤다. 한 판에 투자하는 시간이 1시간 내외로 긴 만큼, 졌을 때 오는 스트레스도 크다. “항상 이길 수만은 없으니까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어요. 키보드 부수면서 스트레스 푸는 것보다는 말로 하는 게 낫지 않나요?” 임창균 씨는 채팅을 통해 팀원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롤은 서로 잘잘못 따지는 ‘정치게임’이에요. 그래도 게임을 이기고 싶으니까 정말 잘 못 하는 사람도 괜찮다고 다독여주곤 해요.” 이장주 소장은 게임 내의 관계는 ‘먼 관계’이기 때문에 채팅에서 현실에서는 못할 말을 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상대적으로 멀고 얕은 관계에 해당하는 온라인 의사소통에서는 가까운 관계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욕구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욕하는 정글러를 차단하고 게임을 계속했다. 상대 정글이 갱(Gang, 공격로 기습)을 온 것도 끊었다. 아슬아슬하게 피가 남은 베인을 힐을 통해 극적으로 살려냈다. 베인 대신 내가 죽기도 하고, 나를 미끼로 베인이 무사히 도망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게임이 끝나고, 베인을 플레이했던 소환사는 나에게 친구추가를 걸었다. 좋은 모습을 보여준 그였기에, 선뜻 요청을 수락했다. 친구가 된 우리는 함께 게임 큐를 기다렸다.

학생들은 롤에서 친구를 사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 관계가 오래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했다. 게임을 같이 한두 판 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 처음 보는 사람과 호흡이 계속 잘 맞기는 어렵다. 이장주 소장은 롤에서의 피상적 인간관계도 ‘필요한 관계’라고 분석했다. “사람들은 깊은 관계만을 선호하지는 않아요. 깊은 관계는 친밀감이나 편안함을 주기도 하지만, 나의 감정이나 욕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기 때문이죠.” 이 소장은 그러한 면에서, 오프라인과 온라인 관계를 ‘보완적 관계의 툴(tool)’로 봤다.

승리를 위한 협력
롤의 게임 유형 중에는 ‘빠른 대전 게임’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과 팀을 이뤄 하는 빠른 대전 게임에서는 플레이 할 캐릭터를 정하는 픽(pick)창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서로 원하는 포지션이 겹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미드(mid) 안주면 던짐’이라는 말은 유저들 사이에선 관용구와 같다. 그러다보니 게임을 시작하기 전부터 양보와 협상이 필요하다. 어찌어찌 해 픽창을 넘어갔어도 순탄하게 게임이 흘러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로의 플레이 방식이 마음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다.
롤은 협동 게임이다. 팀원들이 각자의 포지션에 맞는 역할을 수행해야 팀 전체가 이득을 보고, 이득은 승리로 이어진다. 하지만 스노우 볼(snow ball)을 굴려 작은 이득을 큰 이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팀원 간의 호흡이 필수적이다.
학생들은 롤을 하다보면 모르는 사람과의 협동이 의외로 잘 이뤄진다고 말한다. 박광현(간호대 간호12) 씨는 현실에서보다 롤에서 더 협동의 체제가 잘 이뤄지는 것 같다고 느낀다. “팀플만 봐도 다섯 명이 같은 목표를 갖고 열심히 하는 경우는 찾기 힘들어요. 오히려 동상이몽일 때가 더 많죠. 하지만 롤에서는 ‘이겨야 한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협동이 잘돼요. 잘못되면 애증관계가 되지도 하지만요.” 임창균 씨도 같은 점을 말했다. “롤이 게임 시간이 길기 때문에 생각보다 협동이 잘 돼요. 탈주자 규제 때문에 맘대로 게임을 그만둘 수도 없고요. 한 게임에 투자 하는 시간이 많으니까 더 이기려고 노력하죠.”
인간은 단체에 속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으며, 사회적 유기체의 일부로서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 콘텐츠적 측면에서, ‘협동과 역할수행’을 게임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보기도 한다. 혼자서는 완수할 수 없는 일을 타인과 함께 이뤄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은 콘텐츠의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e스포츠와 보는 게임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삼성 화이트와 중국팀 로얄클럽(Royal Club)의 결승전은 나의 생애 첫 경기 관람이었다. 월드컵 경기장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같이 롤 경기를 보는 것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모르는 사람과도 같은 팀을 응원하면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았다.
결승전 티켓은 한국 플레이오프가 시작되기도 전인, 여름에 샀다. 한국 팀이 결승전에 올라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 없이 결승전 티켓을 샀다.

2014년 LoL World Championship이 한국에서 개최됐다. ‘롤드컵’이라고도 불린 월드 챔피언십에는 각 국의 프로게임단이 출전해 승부를 겨뤘다. 유럽, 북미, 중국 등지에서 지역별 대회도 개최된다. 한국의 경우, ‘LoL Championship Korea’라는 리그가 진행 중이다. 케이블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실시간 검색어에 자주 등재될 정도로 롤 유저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다.
학생들은 e스포츠를 팀에 애착을 갖기 때문에 본다고 했다. 조성원(공과대 전기전자14) 씨는 프로게이머 ‘페이커(faker)’가 데뷔했을 때부터 팬이었다. “e스포츠 보고 나서는 선수가 플레이하는 것을 보고 감탄해 따라해보고 싶었어요.” 조성원씨가 롤에서 가장 선호하는 캐릭터는 ‘르블랑(Le Blanc)’. 페이커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캐릭터다. CJ Entus의 팬인 박경민(공과대 전기전자11) 씨는 이상적인 플레이를 선수들이 직접 보여주는 것에서 만족을 느낀다. “우리가 입으로 말하는 것을 선수들은 그대로 보여주니까 경기를 봐요. 그리고 운이 좋으면 게임에서 프로 선수들을 만나 같이 플레이할 수도 있어요.” 민경배(경희사이버대 모바일융합학과) 교수는 오락과 학습의 측면에서 e스포츠 관람을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프로의 플레이가 높은 수준을 보여주니까 즐기는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일반 스포츠를 보는 경우, 가령 농구 경기를 보고 흉내를 내는 것과 같이 프로게이머의 스킬들을 보며 학습이나 모방을 하려는 경우도 있겠죠.”
많은 학생은 프로 리그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TV에서 일반인이 진행하는 게임 방송, 프로 게이머의 스트리밍 또한 시청하고 있다. 서혁진(경영대 경영14) 씨는 “개인방송은 BJ들이 게임에서 지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임창균 씨는 게임 구조상, 역전이 가능한 여지가 많은 롤만의 특징이 이러한 방송을 재미있게 만든다고 봤다. “옛날에는 질 듯 말듯 재미있게 하는 개인 방송은 없었어요. 하지만 롤은 게임을 못하는 사람의 방송이라도 재미있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점에서 롤을 하는 게임방송은 실력만을 보는 방송이 아니라 ‘재미’를 위해 보는 방송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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