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종교가 아닌 과학이다” 현각스님은 4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같이 얘기했다. 이는 종교와 과학은 양립불가하다는 기존의 통념을 깬 말이다. 그런데 이미 10년 전, 불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책까지 집필한 과학자가 있다. 본교 양형진(과기대 디스플레이반도체물리학과) 교수다. 양형진 교수를 만나 불교와 과학의 상관관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어떻게 불교와 과학을 연관 짓게 됐나.
“유학 시절 미국에서 물리학 공부를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홍선스님을 뵙게 되면서 불교공부를 하게 됐어요. 그 후 불교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게 해 준 건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이었어요. 그러면서 불교 교리와 과학에 비슷한 점이 있다고 느꼈죠.
저는 자연과학을 자연의 세계를 좀 더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피상적으로는 알기 어려운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부처의 가르침을 잘 살펴보면 그 속에도 세계의 존재 방식이나 이 존재 방식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와 과학에 어느 정도 연결고리가 있는 셈이죠.
종교와 과학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말이 나오는데, 애초에 그런 관계는 서양에서 나오는 신 중심 종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서양에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신과의 합일’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에요. 불교에서 부처는 신이 아니죠. 애초에 부처가 말씀하신 것은 가르침이었지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부처는 ‘내가 하는 모든 말을 무조건 믿지 말라’고 말했어요.저는 그 중에서도 연기론이 과학과 굉장히 밀접한 연관이 있다 생각해요. 연기론은 불교의 핵심사상입니다”

과학의 어떤 부분에서 연기론을 발견할 수 있나.
“우리가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날려보면 직선으로 날지 않고 흔들리는 걸 보게 됩니다. 종이비행기를 날린다는 행위에 사람이 물체에 가하는 힘뿐만 아니라 공기의 흐름, 압력 등과 같이 다양하고 복합적인 원인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합적 원인에 대해 하나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는 과학에서 흔히 접할 수 있죠.
불교의 연기론도 이런 원리에 기초합니다. 불교에서는 씨앗과 싹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 있습니다. 씨앗에서 싹이 나는 과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부처는 이 과정이 신비적이고 주술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싹이 씨앗에 의존하고 얽혀서 발생한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것이 연기론입니다. 모든 사물은 서로 연관을 맺고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죠.
연기론의 핵심은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입니다. 무아란 세상에 변하지 않는 본성은 없다는 것이지요. 바닷물을 맛보면 짜다고 생각이 들죠. 그런데 그렇다고 바닷물에 짜다는 ‘본질’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짜다고 느껴진다는 것은 내 감각일 뿐입니다. 어떤 대상이 있다고 느껴지는 건 내가 그렇게 느낀 거지, 그것 자체가 본질일 수는 없는 겁니다. 이것이 무아입니다. 또한 무상이란 만물은 항상 변하며, 영원한 실체로 존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돌아와 연기론을 과학에 적용해 봅시다. 물 분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물 분자가 물의 성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산소 원자와 두 개의 수소 원자가 서로 의지하여야만 가능합니다.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를 아무리 따져서 분석해도 그들이 서로 의지함으로써 성립되는 물 분자의 특성은 나타나지 않아요. ‘물’이라는 존재나 관념, 명칭은 개개의 원자가 서로 의지한다는 인연의 성립에 의해서만 비로소 드러날 수 있는 것이죠. 이런 연기의 세계관으로 보면 결국 다양한 의존과 연관의 관계 속에서 만물은 조화를 이루게 되는데, 이는 또 화엄(華嚴)의 세계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화엄의 세계관은 과학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나.
“우선 이를 위해 화엄을 이해해야겠습니다. 화엄이란 불타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로, 온갖 부처의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입니다. 한 예로, 화엄에는 상입(相入)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 스스로 혼자 존재할 수 없는 무실체적인 존재자가 서로 의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죠. 상입의 예는 천장에 달려 있는 하나의 전등을 보면 쉬울 것 같습니다. 뉴턴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천장에 달려 있는 하나의 전등에 적용해 봅시다. 이 전등에 지구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음에도 이 전등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천장이 전등을 들어 올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천장이 전등을 들어 올려 주고 있는 만큼 전등은 천장을 끌어내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장이 내려앉지 않는 것은 천장을 집의 벽면과 기둥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얘기는 끝없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무한히 계속하여 적용하면 하나의 전등이 천장에 걸려있기 위해서는 전 우주가 동시에 이 사건에 참여하여야 할 겁니다. 이 전 우주적 상호 참여, 전 우주적 상호 투영이 바로 불교서 말하는 상입인 것이죠. 하나의 전등이 천장에 걸려 있다는 이 간단하게 보이는 사건도 상입이라는 불교의 개념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습니다.
화엄에서는 ‘마음이 온갖 그림을 다 그린다’고도 합니다. 마음은 재주가 좋은 화가와 같다고 하죠. 지금 제 앞 테이블에 놓여 있는 컵을 생각해 보세요. 이 컵의 속도를 물리적으로 계산하면 얼마나 나올 것 같습니까. 당연히 0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런데 일반적으로 벡터량은 좌표변환에 의하여 그 값이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물체의 속도라는 물리량은 그 물리량을 관측하는 사람의 운동 상태가 규정되지 않고서는 정의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테이블 위에 있는 컵이 정지해 생각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지구 표면을 그 기준으로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만을 감안하더라도 매 초당 30 km의 속도로 움직인다고 하여야 할 컵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정지해 있는 것으로 단정하는 이유는 우리가 언제나 그 컵과 같이 움직여 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상과 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설정되느냐에 따라 대상의 모습이 달리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컵이 정지해 있어서 내게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나와 대상 사이에 설정된 관계 때문에 컵은 나에게 정지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거죠.”

앞으로도 불교와 과학이 함께 연구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잘 보면 모든 것이 연관과 의존의 관계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연관과 의존의 연기적 관계 위에서 새로운 속성이 창조적으로 발현되면서 세상의 다양성이 이루어집니다. 아마도 이게 우리 우주의 가장 신비로운 기적일 겁니다. 이에 대한 이해에서 불교와 과학은 같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와 과학은 둘 다 인류가 이룩해 낸 소중한 문명이며,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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