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적 관점에서 부처님의 출현은 새로운 문명의 길을 여는 계기였다. 부처님이 활동하던 기원전 5~6세기는 야스퍼스가 말하는 ‘축軸의 시대(Axial age)’의 정점이었다. 그리스에서는 탈레스를 위시한 자연철학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였고, 근동近東 지역에서는 선지자들이 등장하였으며, 중국에서는 공자가 활동하던 시기였고,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의 사색가들과 함께 자유사상가들인 사문(沙門, śramaṇa)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한 다섯 비구가 법륜에경의를 표하는 모습. 부처님은 당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려 했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부처님이 제시한 새로운 문명의 전환
당시 인도사회는 사상적으로 새로운 변화의 한 가운데 있었다. 베다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문들은 세계와 인간 존재에 관한 다양한 견해를 펼치고 있었다. 유물론자唯物論者도 있었으며 도덕을 부정하는 ‘무도덕주의자’도 등장하였다. 해탈을 위한 수행법 또한 다양하였다. 사상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혼란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른바 새로운 길을 찾기 전의 모색과 방황의 시기였다.

▲ 석가사유상의 모습. 부처님은 명상을 수행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이러한 방황을 끝내고 새로운 길을 연 것은 바로 부처님이었다. 부처님의 출가와 수행 그리고 성도하신 이후의 전법 등 부처님의 삶의 이력과 그 가르침은 굳이 여기 다시 요약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다만 부처님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문명적 전환’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몇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교사敎師’로서의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당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려 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비언어적 체험’을 ‘가르침’으로 체계화하였으며 몸소 수행공동체를 이끌었다. 당시 인도의 종교문화에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스승의 종교적 체험은 일종의 ‘우주적 비밀’이었으며 그의 가르침은 비기秘記로서 간주되어 제자를 통해 일대일로 전수될 뿐 대중적인 가르침을 펴는 일은 결코 없었다. 부처님은 당신의 ‘깨달음’을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 없이 모든 사람과 공유함으로써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진리와 구원의 보편성’이라는 새로운 길을 여셨다.
둘째, 수행을 위한 명상의 강조다. 당시 인도의 종교문화에서 명상은 우주적 자아와의 합일과 같은 신비체험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명상을 수행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셋째, 선정과 지혜의 결합을 통해 수행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고대인도의 대표적인 명상법은 ‘선정’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선정과 정념正念을 결합함으로써 선정으로부터 지혜(반야)를 체득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넷째, 행위와 그 결과간의 도덕적 인과관계를 강조하였다. 불교의 업설業說은 바로 이 점에 기초하고 있으며, 당대의 다른 종교사상과 불교를 구별하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바라문교의 경우, 행위란 곧 제식과 관련된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를 뜻하였다. 사문 전통에 속하는 자이나교의 경우에도 ‘신체적 행위’가 도덕적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마음의 행위(意業)’가 도덕적 판단의 가장 중요한 근거임을 밝히셨다. 이는 인간 행위의 윤리문제가 신에 대한 제사 등과 같은 외형적인 문제로부터 내면의 문제로 전환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다섯째, 부처님 당시 바라문교 전통에서 윤회는 ‘반복되는 삶’ 혹은 ‘반복되는 죽음’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니었다. 부처님은 욕망이 바로 윤회의 원인임을 지적함으로써 윤회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부처님을 통해 ‘윤회’는 비로소 도덕의 근거이자 행위의 과보가 일어나는 도덕적 장소場所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욕망의 발생과 소멸의 과정을 윤회적 관점으로 고찰하고 다시 윤회의 세계를 욕망이라고 하는 인간 내면의 동학動學으로 전환하였다. 이것이 소위 십이연기의 발견이다. 이를 통해 윤회를 극복하는 길, 즉 해탈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수행을 통한 욕망의 절멸이었다. 
이상의 다섯 가지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식에 속하는,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당시 고대인도 사회에서 그 누구도 찾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었다. 이 길은 지금의 우리가 당연하고 상식으로 여길 만큼 부처님 이후 인류가 걸어갔던 길의 방향과 기준의 역할을 해 왔다. 부처님의 출현을 문명사적 전환의 계기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초고도 위험 사회 속, 한국불교의 역할
불교의 문명사적 의의는 고대인도 사회에 그치지 않는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와 동아시아 문화의 결합은 일종의 문명사적 사건이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인도문화와는 문화적 토양이 전혀 다른 문명권에서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렸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두 문화 간의 동화同化와 적응을 통해 새로운 ‘동아시아 불교’로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는 단순한 이식의 과정이 아니라 상호적이며 교차적인 동화와 적응을 통한 점진적이며 지속적인 과정이었다. 그런 가운데 불교가 동아시아 문화에 새로운 문명적 계기를 마련한 바도 적지 않다. 불교를 매개로 한 문명교류는 단순히 사상적 측면에만 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의 교류였고, 경전과 종교적 상징물과 같은 새로운 문물의 이동이었으며, 언어학적 체계가 전혀 다른 두 문화권을 ‘번역’을 통해 소통해야 하는 지적 실험과 도전의 과정이었다. 그런 과정을 지나 동아시아 불교는 단순히 원산지의 불교를 이식한 ‘수입 불교’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창조적 계승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문명교류사의 흔치 않은 성공 사례였다.
한편 21세기를 막 시작한 지금, 인류는 문명사적 대 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다. 지난 200여 년간 인류문명은 소위 ‘근대(modern)’ 문명의 시대였다. 근대문명은 인권과 자유의 신장, 산업의 발달과 물질적 풍요, 과학의 발달 등 인류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지만 그 반대급부로 근대적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폐해도 컸다. 환경과 기후변화 등과 같은 자연적 재앙에서부터 자본과 정치권력의 합작으로 만들어내는 인위적 위기들, 이를테면 전쟁, 에너지, 식량 등과 같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온갖 문제들이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는 초고도의 위험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위험은 거의 대부분 제도적인 혹은 시스템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해 당사자 개인의 각성이나 계몽으로 해결될 수 있는 위험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오늘날 인류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근대적 산물’로 치부하고 근대에 모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문제들이 근대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근대는 인간의 자연 지배를 과학의 발전과 인류의 진보라고 생각하였으며, 인간의 욕망을 제어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성취되어야 할 것으로 긍정하였다. 인간의 이기심을 성취의 동기로 생각하였으며 자본의 탐욕성을 시장의 원리로 간주하였다. ‘욕망’과 ‘발전’이라는 근대적 신화는 자연의 생태계만 훼손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생태계조차 파괴하여 인류사회 전체를 양극화로 치닫게 하고 있다. 근대적 제도와 시스템의 폐해가 속출하는 가운데 21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인류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욕망’과 ‘발전’으로 요약되는 근대적 가치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 없이는 지금 우리에게 닥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 또한 보장 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동서양의 여러 뜻있는 사람들이 인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문명을 모색하고 있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서 그 가능성을 찾고자 하며 그 해결의 길을 묻고자 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불교인들은 지금 각자가 서있는 자리에서 스스로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불교는 그러한 문명사적 대 전환의 길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조성택
본교 교수, 문과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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