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강제노역, 일본군 ‘위안부’ 등 일본제국의 식민지배로 생긴 논란이 광복 70주년이자 한일수교 50주년인 2015년까지 계속되고 있다. 10일부터 12일까지 사흘간 본교에서 ‘제6회 역사 NGO 세계대회’ 프로그램 중 하나로 진행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제의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워크숍에서 그 원인을 찾아봤다. 이장희(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와 양기호(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등을 비롯한 학자들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관해 토론을 나눴다. 이장희 명예교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이해하지 않고는, 현재 진행 중인 역사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세울 수 없다”고 말했다.


희석된 식민지배 책임규명
한국과 일본 간 역사를 두고 갈등이 계속되는 이유는 전승국인 연합국과 패전국인 일본이 1951년 일본의 전후처리를 위해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허술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배상을 받는 국가의 범위를 ‘현재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거나 손해를 입은 연합국’으로 제한했다. 당시 한국은 연합국이 아니었기에 전승국이 아닌 ‘기타 식민지 피해국’으로 분류돼 일본에게 배상을 받지 못했다.
다만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4조 (a) 항에서는 △일본이 식민지에 있는 일본 재산(채권, 채무 등)을 돌려받을 권리 △식민 피해국이 일본에 있는 재산을 돌려받을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65년 한국과 일본은 청구권에 대해 협정을 체결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1965년 한일협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묻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이장희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전승국과 패전국 간의 양자조약이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의 최대 피해자인 중국, 타이완, 남한, 북한이 배상청구권을 갖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 결과 1965년 한일협정 체제라는 ‘사생아’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4조에 따라 체결된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해 이장희 명예교수는 “한일협정은 일본의 전쟁책임과 식민통치의 책임에 대한 사과와 반성 없이 국가 간 경제협력을 위한 조약으로 처리됐다”라며 “조선인 강제노역 피해자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2005년 8월 국무총리 주제 ‘민관합동위원회 발표’에 의한 1965년 한일협정 외교문서 공개 이후 1965년 청구권협정 협상 때 8개 대일청구 항목에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동포, 한인 원폭피해자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과정에서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피해 당사국이 제외돼 조항의 해석차이로 영토분쟁이 발생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2조에서는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타이완, 쿠릴 열도 등 일본이 주권을 포기하거나 반환해야 할 지역을 명시했다. 한국은 전승국으로 인정받지 못해 조약체결에 참가하지 못했다. 타이완 역시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중 누가 중국을 대표하는지를 두고 미국과 영국의 의견이 엇갈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에 참가하지 못했다. 한국과 대만 등 식민피해국이 조약 체결과정에 참가하지 못해 현재까지 쿠릴 열도, 댜오위다오(釣魚島), 독도의 영유권에 대해 조약 해석이 서로 다르다. 이는 동아시아 영토분쟁의 발단이 됐다.


국가 이해(利害)에 따라 선언하고 조약하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립이 최초로 언급된 카이로 선언 역시 강대국인 미국과 영국, 중국의 이해가 반영됐다. 박태균 교수는 “카이로 선언의 내용은 미국이 중국의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유럽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라고 말했다.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 중국은 미얀마 전선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상호간 협조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카이로 선언에서 중국과 영국의 의견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민족자결권 조항을 전범 국가인 독일에게 점령된 유럽국가(프랑스, 폴란드 등)에만 적용해야 하고 유럽국가의 식민지에는 민족자결권을 적용하면 안 된다는 태도를 보였다.
카이로 선언 결과, 비유럽국가인 일본의 식민지배 아래 있던 한국과 타이완은 민족자결권이 적용됐다. 하지만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얀마의 독립은 언급되지 않아 미얀마는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러야 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역시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 체제가 투영돼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냉전으로 인해 공산국들과 제3세계 국가들은 배제된 채 미국이 주도했다.  제3세계 국가인 인도, 미얀마, 유고슬라비아는 참가하지 않았다. 공산국인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는 참가했지만 조약에 서명하지는 않았다. 양기호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미국의 동북아정책(일본을 냉전 시대의 파트너로 삼는 것)에 근거해 추진됐다”라며 “이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일본에 관대하게 적용됐다”라고 말했다.
조약체결이 있던 1951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일본마저 소련과 중국의 공산세력권에 흡수된다면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공산권 국가와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도시환 연구위원은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을 공산권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한 보루로 삼으려 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전후 일본 제국세력을 와해해 동북아의 평화를 꾀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변하자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은 동북아정책을 대폭 수정해 일본을 통해 공산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이후 미국은 일본과 미·일 안보조약을 체결해 공산권 세력 확장을 견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이 냉전으로 인해 미국의 보호를 받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이다.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냉전의 영향으로 전후 문제를 해소하는 조약이 아니라 일본의 전쟁책임을 희석시키는 조약이 됐다”고 말했다.


한일 양국 지식인의 공동대응
이장희 명예교수는 “동아시아 평화는 일본이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침략 전쟁 행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일본의 과거 행위에 대한 사과와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해 양국에서 일부 학자들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10년 한국과 일본에서 한국인 학자 109명과 일본인 학자 105명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1910년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은 무효’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도시환 연구위원은 “2010년을 기점으로 과거 역사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적인 변화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2011년, 일본군 ‘위안부’ 헌법소원에서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배상청구권이 한일협정으로 소멸하지 않았으며, 일본이 배상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2012년 대법원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관련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1965년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기 어렵다’며 미쓰비시중공업 등을 상대로 한 한국 원고들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했다.


사진│서동재 기자 awe@
참고문헌│박병섭著 <독도연구 제16호-대일강화조약과 독도 · 제주도 · 쿠릴 · 류큐제도>, 마고사키 우케루(孫崎享)著 <일본의 영토분쟁>, <Treaty of Peace with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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