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잊었던 친구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최근 '창조경제'란 화두가 그랬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반환점을 돌면서 각종 분석과 전망이 들리면서였죠. 창조경제가 여전히 모호하고 미흡하다는 비판에 말을 보태려는 게 아닙니다. 창조나 창의성이 규정하기 쉬울 리 없고 단기간에 달성하기도 어렵겠지요. 오히려 저는 우리 경제가 너무 '크리에이티브'해서 문제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를 찾아 잠깐 강남역으로 가볼까요.

한국 대표 상권답게 강남역 출구를 나서면 각종 전단지가 날아듭니다. 여기까진 새로울 게 없는데 롯데시네마 골목으로 접어들면서 창의적 풍경이 시작됩니다. 환갑은 진작 지났을 할머니들이 커다란 배너를 어깨에 메고 돌아다닙니다. 멀티방부터 육쌈냉면, 봉구비어까지 홍보 업종도 다양합니다. 노련한 노년 일꾼들은 왼손으로 전단지, 오른손으론 쿠폰을 발급하는 멀티태스킹까지 구현하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창조적 일자리 형태를 다른 어떤 선진국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청년과 장년의 창의성도 만만치 않습니다. 낮의 일자리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이들은 심야라는 블루오션으로 거침없이 나아갔습니다. 24시간 카페가 어느새 일상이 되었고, 24시도 모자라 25시를 표방하는 편의점이 속속 들어서고 있습니다. 시간뿐 아니라 공간의 빈틈도 놓치지 않고 움직이는 일자리를 만들어 냅니다. 거의 모든 음식이 언제든 배달 가능한 서비스와, 어떤 지역으로든 이동 가능한 대리운전 시스템 모두 청장년층이 창출한 '아래로부터의 창조경제'입니다.

이처럼 우리 경제에 '창조'는 넘칩니다. 부족한 것은 세대를 아우르는 경제 주체들의 창조적 노동에 대한 '처우'입니다. 배너를 지고 배회하는 할머니의 시급으로 육쌈냉면 한 그릇을 사먹을 수 없고, 심야 카페 청년 알바들의 임금은 어김없이 최저임금에 그칩니다. 배달 기사나 대리 기사의 여건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정부는 거대한 창조의 씨앗을 찾아 헤매기보다, 바닥에 핀 창조의 꽃들이 시들거나 꺾이지 않게 지켜 주어야 합니다. 노동의 대가를 상식적 수준에서 보장해주고,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서 겨우 창출한 기회가 뺏기지 않도록 상권을 보호해주는 일이 창조경제의 선결 과제입니다.

2000년부터 안암동 상권에서 시작된 창의적 비즈니스 하나가 얼마 전 자취를 감췄습니다. 영철버거는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홀로 상경한 이영철 사장이 모든 창조적 역량을 동원해 리어카에서 시작한 브랜드였습니다. 그는 노점 음식에 위생 개념을 도입했고, 패스트푸드 스타일에 웰빙을 접목했습니다. 그런 스토리를 알기에 본점 폐업 소식이 더 안타까웠습니다. 영철버거의 좌절이 본교를 넘어 사회적 이슈가 된 까닭은 그의 노력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노력에 대한 대가가 부족했음을 우리 모두 인정하기 때문은 아닐지요. 재학생으로서 졸업생으로서 영철버거의 발전을 뿌듯하게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1000원'만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이영철 사장의 재기를 응원합니다.

 

강유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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