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있었다. 어머니가 쥐어준 차비로 아이들에게 풀빵을 나눠주던 청년은 캄캄한 밤길을 걷고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청년을 나무라던 어머니가 있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거란 어머니의 질타에도 청년은 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청년은 어머니께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못 다한 일을 이뤄 달랬다. 어머니는 이 한 마디를 끝까지 붙잡았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자식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다독이고 같이 울었다.

어머니가 떠난지 꼭 4년이 지났다. 어머니와 청년이 있는 곳으로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청년을 이야기했다. 청년의 유산은 어머니였고 어머니의 유산은 청년이었다.

▲ 사진 | 김범석 기자 conan@

이소선 어머니 4주기 추도식

“이쪽 길이었지?” 3일, 오전 11시가 되자 마석 모란공원에는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자주 보기 힘든 얼굴을 만난 듯 연신 인사를 나누는 그들 뒤로 이소선 어머니의 묘가 있었다. 청년 전태일의 묘 뒤편에 위치한 그의 묘는 생전에 그랬듯 아들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는 모양새였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이라고 적힌 비석에는 생전 어머니의 모습도 담겨있었다. 마이크를 굳게 쥐고 무언가를 말하는 어머니의 모습 양옆으로 그를 기리는 조화가 나란히 놓였다. 흰색 조화가 형광등처럼 빛날 만큼 햇빛은 강렬했다. 그늘에서 햇빛을 피하던 사람들은 식이 시작된다는 말과 함께 어머니의 묘 앞으로 단정히 모였다.

민중의례와 추모기도가 끝나고 추모사를 하러 나온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장남수 회장은 어머니의 묘 앞에서 담배를 꺼냈다. “어머니! ‘남수야, 담배 좀 가져와라’ 하실 줄 알고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향로에 담배를 가지런히 꽂은 장남수 회장은 흐느끼듯 말을 이었다. “어머님, 어머니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면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어머님이 꿈꾸셨던 세상을 이루어 내는 것을 아직껏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4명의 추모사가 이어지는 동안 200명이 넘는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헌화와 절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자 북적이던 묘역에는 정적이 돌았다. 향로에는 까맣게 타들어간 담배가 남아있었다. 영정 속의 어머니는 아들의 묘지 너머로 걸어가는 또 다른 자식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듯 했다.

오후 8시, 종로 인디스페이스에서는 이소선 어머니 4주기 <어머니> 추모상영회가 열렸다. 어머니가 쓰러지기까지 2년간의 모습을 담은 태준식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어머니>는 노동운동가로서의 강인한 이소선이 아닌 소탈하고 친근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줬다.

영화 상영이 끝나자 인디다큐페스티벌 주현숙 집행위원과 전태일재단 이수호 이사장의 ‘인디토크’가 이어졌다. 이수호 이사장은 전태일 정신 자체가 이소선 어머니의 정신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태일 열사가 어머니께 뒷일을 부탁했다는 일화는 그만큼 전태일 열사가 어머니께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그 약속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 정말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으셨고요.”

영화와 전태일, 이소선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던 이수호 이사장은 어머니의 일관된 메시지 하나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어머니가 끊임없이 이야기하셨던 것은 ‘하나가 되라’입니다. 참 부끄럽지만 노동자 사이에서도 양대노총 갈등 등 분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서로 잘났다고 싸우지 말고 뭉쳐서 하나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해보이면서도 가장 핵심적인 지표를 제시해 주신 셈입니다.”

전태일 45주기 여는 마당

5일 오후 3시, 금방이라도 큼직한 빗줄기가 내릴 것만 같은 하늘이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전태일 45주기 여는 마당 전태일 청계 평화’이 열리는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에 평화시장 상인들과 시민들이 모였다. 청년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그 자리, 45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먹거리를 나누며 전태일과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청년 전태일 45주기를 여는 마당은, 그렇게 ‘어울림’으로 시작했다.

소리패의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사람들은 더욱 모여들었다. 다리의 한 켠에서는 한지에 소망을 적어 매다는 공간도 마련됐다. “손주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비정규직에서 벗어나고 싶다” “대학을 벗어날 때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있길” 다른 세대, 다른 꿈을 꾸는 이들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꿈을 나눴다. 한지가 매달린 건너편에는 2미터 남짓한 크기의 커다란 전태일 동상 뒤로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와 전태일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판넬이 서있었다. 서로의 시대에서 각자의 아픔을 품었던 그들의 모습은, 이 자리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 듯 했다.

30분이 흘렀을까. 이제는 노래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전태일 동상 옆에 마련된 자그마한 무대에 섰다. 두 번째 차례로 무대에 오른 이수진 씨는 전태일 다리에 얽힌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이 곳에 늘 세워져있던 오토바이 옆에서 몇 년간 노래를 불렀어요. 노동과 현실에 대한 노래였으니 물론 돈은 되지 않았죠.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점점 많아지는 현실에서 저는 나름의 방법으로 용기를 내보고 싶었습니다.”

5명의 가수가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누군가는 힙합을 했고, 누군가는 기타를 쳤다. 전태일 다리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의 감성으로 귓등에 스치는 노랫말에 빠져 들었다. 어느새 시간은 5시에 이르러 여는 마당을 맺는 풍물패의 가락이 울려 퍼졌다. 풍물패는 객석으로 향했고 시민은 함께했다. 무대에서는 소망을 담은 한지에 불을 붙였다. 시민이 어우러져 흥이 한껏 오르는 만큼 시커먼 연기도 피어올랐다. 전태일 동상이 서있는 곳에서 전태일이 있는 곳까지, 연기는 바람 따라 흩어졌다. 그렇게 여는 마당은 끝났고, 전태일 45주기의 여정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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