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 해결을 외치며 분신한 최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하려다 경찰과 마찰이 있었어. 그러다가 소녀상에 머리를 부딪쳤는데 후유증이 있나봐.”

병원을 다녀왔다는 전태삼(남·66) 씨에게 이유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1970년 11월, 형의 죽음을 신문으로 접해야했던 한이 남아서였을까. 지금도 현장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그를 만나 전태일과 청년의 길을 물었다.

형에 대한 기억을 묻자 그는 청계천을 떠올렸다. “내가 11살 즈음 13살이던 형과 청계천 곳곳을 쏘다니며 방비, 적쇠, 솔 같은걸 팔고 그랬어. 용두동에서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을 돌아다니다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그랬지.” 그 어린 나이의 태삼은 형이 나중에 이곳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았을까. “대구로 이사하고 형은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갔어. 그런데 아버지가 공부를 못하게 하니까 기어코 공부를 해야겠다며 나를 데리고 서울로 가출했지. 그러고 다시 이 곳 청계천 평화시장에 다다랐을 때 이미 모든 일은 결정 난 셈이나 다름없었어.”

그는 전태일의 행동은 20대만이 지닐 수 있는 기개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결국 역사를 끌어온 수레는 항상 20대의 것이었어. 자연의 섭리와 부합하는 최선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노동과 민주화의 역사를 돌아봐. 명예와 권력에 끌려다니지 않는 청년들은 앞으로도 역사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할거야.” 그는 지금의 청년들에게 오염된 현실과 타협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허황된 지식과 부도덕한 자본에 취해버려선 안 돼. 그건 형이 이야기했던 ‘기계’와 다를게 없어. 삶의 주인이 되어야한다는 소리야.”

주인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는 노동자의 주체성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였다. 세상 모든 것은 노동자의 손에서 나오는 만큼,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의 역할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씨가 없으면 과육은 맺어지지 않아. 노동자는 씨앗이야.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추도제에 과일을 놓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야. 노동자만이 이 세상에 봄을 가져오고 풍부한 살들을 붙일 수 있어.”

지금처럼 갈등과 좌절이 만연하는 상황에서 청년과 노동자가 주체의식을 지닌다고 과연 봄이 올 수 있냐고 물었다. “계절은 그 어떤 혹한서리가 있어도 결국은 바뀌어. 봄은 분명히 와. 역사는 앞에서 기다릴 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좌절해선 안 돼. 전태일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건 결국은 청년, 그리고 노동자란걸 명심해줬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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