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은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가 시각장애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사회적인 관심과 배려를 이끌어내기 위해 선포한 ‘흰지팡이의 날’이다. 흰 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의 사회적 보호와 안전보장, 자립을 상징하고 있다. 기획부에서는 흰 지팡이의 날을 맞이해 시각장애인 관련 기획을 준비했다. 이번 기획을 통해 비시각장애인의 시각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이해도를 높이고자 한다.

▲ 사진│서동재 기자 awe@

세종대왕이 시각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에 시력이 나빠진 중도 시각장애인이었다. 이처럼 시각장애 대부분은 후천적인 원인으로 인한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 등록된 시각장애인 수는 2014년 기준 252,825명이고,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우리나라 전체 시각장애인구를 309,139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출생 전 혹은 출생 시에 시각 장애가 발생한 사람은 2.3%에 불과하다. 시각장애인의 95.6%는 돌 이후에 시각장애가 발생한 경우다.

본교 대학원생인 A씨도 중도시각장애인이다. 그는 초고도근시 상태였다가, 시력이 점점 나빠져 12년 전에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A씨는 2011년부터 실명 상태이며, 현재 안내견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안내견을 분양받기 전엔 일 년간 케인(시각장애인이 보행을 위해 사용하는 흰 지팡이)으로 보행했다. 이런 그에게서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데 느끼는 어려움을 들어봤다. 학교, 지하철, 식당 등의 동행취재와 인터뷰를 병행해 이야기를 부분적인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길 위의 지뢰, 볼라드와 점자블록

# 밖에서 케인으로 다닐 때는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밥을 주거나 배변을 시켜야 하는 안내견에 비하면 관리하긴 쉽지만, 길을 걷다 지치기 일쑤였다. 내 스스로를 거리의 위험요소로부터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를 달리는 오토바이 소리는 공포의 존재였다. 이런 오토바이로 인해 점자블록은 깨져있는 곳이 많았다. 길거리에 돌출돼 나와 있는 요구르트 아줌마 손수레, 자전거, 오토바이는 언제나 장애물이었다. 케인으로도 걸리지 않는 볼라드(자동차진입억제용말뚝)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볼라드에 무릎이 걸려 넘어질 때도 잦았고, 정강이가 나가기도 해 상처가 많이 났었다.

인도에 차량 진입을 막기 위해 설치된 볼라드는 시각장애인의 보행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볼라드는 △높이는 80~100cm, 지름은 10~20cm, 간격은 1.5m 안팎으로 할 것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재료 사용 △시각장애인에게 충돌 우려가 있음을 알 수 있도록 앞에 점형 블록을 설치할 것 등의 규정을 지켜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규정에 맞게 설치된 볼라드는 찾아보기 힘들다.

본교에 있는 볼라드도 높이가 무릎 높이도 되지 않거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시각장애인이 알 수 있게 볼라드 앞에 점형 블록을 설치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익숙지 않은 초행길일 경우 많은 시각장애인이 이런 볼라드에 걸려 넘어져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곤 한다.

시각장애인의 보행 안전과 유도를 위해 만들어 놓은 점자블록도 멀쩡한 것을 찾기가 힘들다. 차량진입 등으로 파손되거나 설치한 지 오래돼 훼손된 것이 많아, 케인으로 더듬기가 쉽지 않다. 또한 점자블록엔 전봇대나 차량이 세워져 있어 시각장애인을 가로막아 보행안전을 위협하기도 한다.

 

중증시각장애인 대학생으로 살아가기

# 20살 넘어서 눈 수술을 10차례 넘게 받았다. 수술을 한 번 할 때마다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늘 달라졌다. 그럼 나는 항상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했다. 공부하는 방식, 시험 치는 방식, 여대생으로 살아가는 방식, 태도와 움직임까지 모두 싹 다. 교재를 점자로 바꾸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친구를 잡고 무턱대고 읽어 달라 했다. 판서로 수업을 많이 했던 학부생 시절엔 교수님께 강의안을 따로 달라고 해야 했다. 수업을 다 녹음하고, 프레젠테이션 파일은 변환해서 시각장애인용 노트북으로 보곤 했다. 학기가 끝날 즈음에야 점자로 만들어진 교재를 받아서 다시 한 번 공부했다.

시험도 처음에는 확대한 복사지로 치렀고, 그다음엔 컴퓨터 파일로 문제를 보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파일 활자는 극도로 키울 수 있으니 한 화면에 한 글자씩 확인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시험을 보려 했다. 나중엔 교수님 앞에서 땀을 흘리고 다리를 벌벌 떨면서 구술로 시험을 봤다.

비시각장애인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세상 돌아가는 일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주원이라는 연예인이 강동원을 닮았다더라’. 요즘 새로 나오는 연예인 얼굴은 눈이 완전히 실명되기 전까지 내가 알았던 연예인의 얼굴을 빗대 상상을 한다. 이런 걸 놓고 살면 내 정체성이 흔들릴 것만 같다. 정체성이 흔들릴 때마다 난 아직 학생이고 언젠간 졸업을 할 거고, 난 지금도 앞으로도 예쁜 여자일 거라고 늘 생각한다.

본교에 재학 중인 시각장애인 학생은 2015년 1학기 기준으로 44명이다. 그중 중증 시각장애인(1급~3급) 학생은 A씨를 포함한 4명이다.

A씨의 학부생 시절, 본교에는 지금의 장애인권위원회(2002)와 장애학생지원센터(2008)가 신설됐다. 장애학생필기도우미 제도도 그 때쯤 자리를 잡아갔다. A씨가 학교에 요구해 대학원에도 필기도우미제도가 생겼다. 필기도우미는 필기보조뿐만 아니라, 수업 전·후 강의실 이동 보조 등의 역할도 맡는다. 하지만 일부 필기도우미 학생은 불성실해 가끔 장애학생이 불만을 나타내기도 한다. 혹은 필기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해 수업 내용이 왜곡돼 전달될 수 있는 우려도 있다.

A씨처럼 중증시각장애 학생의 경우엔 시험을 볼 때 글자를 확대한 확대복사지로 시험을 보거나, 더 심한 경우엔 컴퓨터 화면상에 문제를 띄워놓고 시험을 본다. 교재는 점자로 번역하는 게 오래 걸리기 때문에 학기 중에 점자로 된 교재를 받아보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수업은 필기도우미 학생의 도움을 받거나 녹음 파일을 듣고 수업에 따라가야 한다.

 

안내견에 대한 인식 부족

# 통학 길에 늘 이용하는 지하철에서 안내견과 다니며 참 많은 일을 겪었다. 무턱대고 안내견을 만지거나, 나도 모르게 빵이나 과자를 먹이는 사람도 있었다. “만지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예쁜데 왜 만지면 안 되느냐”고 되려 물어보는 경우도 있다. 한 남성이 내 귀에 대고 “만져도 돼요?”라고 말하면 물론 그는 안내견을 두고 말한 것이겠지만, 마치 내가 추행을 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게 안내견은 그냥 강아지가 아닌, 내 신체의 일부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지하철에서 한 여성이 “그거(강아지) 치워. 더러워서 못 앉겠네”라면서 신문을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이유 없이 “예쁜 강아지 왜 노예처럼 부리고 다니냐”라면서 나를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 가끔은 사람들이 사진도 찍는다. 소리가 나지도 않아 누가 동영상을 찍는지 사진을 찍는지 모르겠으니 나는 고개를 괜히 수그리게 된다.

목적지를 향해 바삐 타고 내리는 공간인 지하철 안에서 일일이 그런 사람들을 설득할 수도 없다. 나는 나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여전히 있는지 분간이 안 된다. 허공에 대고 말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언제까지 내가 일일이 안내견에 대한 이해를 구해야 할까.

안내견 양성은 1993년 삼성에서 처음 시작했고, 현재 전국엔 60여 마리의 안내견이 활동 중이다. 안내견 양성 활동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안내견에 대한 인식은 사회 전반에 퍼지지 못했다.

안내견을 만지거나 부르거나 혹은 음식을 주는 행위는 안내견의 집중력을 떨어뜨려 업무를 방해할 수 있고, 이는 고스란히 시각장애인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 또한 현재 장애인복지법 제40조에 따르면 장애인 보조견을 동반한 장애인은 공공장소 등에 출입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식당 업주들은 출입을 막는 경우가 있다. A씨는 실제로 안내견의 출입을 막는 식당 업주와 실랑이를 벌이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정당한 사유 없이 안내견의 출입을 막으면 3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A씨와 동행 취재하면서 보였던 본교 구성원의 안내견에 대한 인식은 준수했다. 아무 말 없이 사진 찍는 학생은 있었지만, 만지거나 먹을 것을 주거나 소리치는 사람은 없었다. 교내 식당이나 카페에서도 안내견의 출입을 막는 곳은 없었다.

본교 구성원의 이해도는 높은 편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몰리는 지하철에선 안내견에 대한 개념 없이 하는 행동들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동행 취재 때 본 것만 해도 귀엽다며 쓰다듬는 중년 여성, 큰 소리로 수군수군하는 사람들,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지나친 배려는 해가 될 수도

# 케인을 가지고 볼일을 보려고 공공화장실에 들어서면 모르는 여성이 도와준답시고 나와 같은 화장실 칸에 들어온다. 들어와선 “괜찮아요. 돌아서서 있을게요”라고 말한다. 내가 ‘괜찮지’ 않다. 내가 부딪히거나 다칠까 봐 걱정됐나 보다. 근데 나도 프라이버시가 있다. 차라리 어디 다치거나 까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같은 칸에 들어갈 필요 없이 가르쳐주기만 하면 되는 걸 지나치게 친절을 베푼다. 그래서 지하철 화장실은 잘 가질 않게 된다.

나를 아무 곳으로나 확 잡아채서 갖다 놓는 경우도 있다. 나는 내가 알던 길로 가야 하는데, 그 사람이 보기엔 내가 있는 곳이 불안해 보여서 그런 거겠지. 그래놓고 나를 안전한 곳에 데려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버린다. 나보고 이제 어떻게 가라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길을 모른다고 내 백팩 위를 잡아채고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길을 안내하는 법을 잘 모르는 분이 도와준다고 하면 나는 그냥 괜찮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게 나한테 더 괜찮다.

안내견과 함께 다니기 전에 내가 우습게 보였는지 내 몸을 더듬거리면서 만지는 변태 같은 사람도 있었다. 여자이고, 혼자이고, 눈까지 안 보이니 나는 쉬운 대상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지금도 케인을 들고 다니면 나는 그런 공포에서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조그만 빌미라도 주기 싫어서 치마도 안 입고, 힐도 신지 않는다. 일부러 밝은 데로만 다니려고 한다. 이런 변태들 때문에 지금도 납치라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있다. 내가 끌려가게 되면 돌아올 길도 없고 잡혀가면 끝인 거니까. 늘 그런 공포를 깨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비시각장애인은 시각장애인의 생활이 무척 불편할 거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생각보다 시각장애인은 생활 자체에 큰 불편함을 느끼진 않는다. 오히려 이와 같은 시각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나 부족한 이해에서 비롯된 행동에 더 큰 불편함을 느낀다.

길에서 시각장애인이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풀지 않아도 된다. 어려움이 있으면 그들이 먼저 요청을 할 것이다. 시각장애인의 길을 안내할 때는 시각장애인의 팔을 잡고 이끌면 안 된다. 등을 밀거나 케인 혹은 옷자락을 잡아당겨도 안 된다. 시각장애인에게 자신의 한쪽 팔을 잡고 따라올 수 있게만 해주면 된다.

시각장애인을 도와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은 오히려 그들에게는 또 다른 차별로 다가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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