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에게 버스는 어떤 의미일까. 버스 안팎에서 다양한 풍경과 사람들을 조우하지만 그들의 모습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계절의 변화를 느낄 여유조차 없는 메마른 일상 속, 특별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버스에서 소소한 이야기를 만났다.

본지 기자 3명이 각각 3개의 버스(성북20, 273, N15)를 탔다. 버스에서 마주한 풍경과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 사진|서동재 기자 awe@

성북20

푸른 공기가 스산하게 다가오는 새벽, 6시 20분이었다. 고려대역 3번 출구를 빠져나오자 곧바로 연둣빛 마을버스에서 나오는 투박한 배기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종점이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가만히 서 있는 버스. 앞 유리의 서리를 털어내는 와이퍼는 출발해도 좋다는 수신호처럼 분주히 움직였지만 버스 운전기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배차시간인 30분에 맞춰 정확히 출발해야 해. 마을버스는 배차간격이 길어서 승객들이 한 번 놓치면 많이 기다려야 하거든.” 30분을 알리는 교통방송의 소리에 맞춰 주행에 나서는 성북 20번에 몸을 실었다.

오늘의 첫 손님은 법대 후문 해병대전우회 건너편에서 분홍빛 외투를 걸치고 버스를 기다리던 어르신이었다. “어서 오세요”라는 운전기사의 인사에 “왜 이리 추워졌대요, 오랜만에 산책이나 하려고 하면 꼭 날씨가 이래”라는 정겨운 대답이 돌아왔다. “첫차에는 보통 운동을 나가시는 어르신들이 많이 타. 7시를 넘으면 학생이나 직장인도 많이 타고.” 버스 운전기사의 설명에 맞추기라도 한 듯 다음 정류소에서는 세 명의 등산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운산을 둘러 고명중학교로 향하는 사이 이들 대부분은 산책길이 서 있는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산길을 벗어난 마을버스는 아리랑고개로 향하며 도심으로 들어섰다.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근처 상점에도, 멀리 보이는 아파트의 창가에도 아직 불빛이 켜지지 않아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과 그 밑을 지나는 용달차와 버스의 전조등이 눈에 들어올 만큼 차분한 거리의 모습. 새벽이구나, 라는 나지막한 혼잣말이 나왔다.

“학생은 이어폰을 안 꽂았네?” 정적이 어색한 듯 버스 운전기사가 말을 건넸다. “요즘 학생들은 하도 이어폰을 꽂고 다녀서 그런지 유독 불안해. 차가 오는 소리도 못 듣고 파란불이면 그냥 건너더라고. 눈은 스마트폰에, 귀는 이어폰에. 사고 나는 것도 여럿 봤어.” 군대에서 안전교육 담당을 20여 년간 했다는 기사님은 전역 후 개인택시 운행자격을 얻기 위해 마을버스를 운전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버스를 3년간 무사고로 운전하면 개인택시나 시내버스 운행을 할 수 있어. 모아놓은 돈이 없는 사람은 한 달에 200만 원도 못 버는 이 일을 하면서 1억 원이 들어가는 개인택시 마련은 어렵지. 대부분 버스 운전기사는 정년퇴직하고 시내버스 운행하려고 마을버스를 몰더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하늘에는 옅게나마 빛이 퍼지고 주택가에도 듬성듬성 불이 켜졌다. 출발 후 30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거리도 꽤 활기를 띠었다. 창밖으로 단단한 옷차림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 수학여행을 가는 듯 짐가방을 끌고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라디오에서 아침방송이라는 말이 여러 번 들리더니 어느덧 새벽 버스는 종점인 고려대역으로 돌아왔다.

50분이 채 안 되는 주행시간이었지만 버스는 성북구와 동대문구 골목골목의 정류장을 지나며 열댓 명의 마을 사람들을 태웠다. 배차 표를 확인한 기사님은 5분 뒤에 다시 출발한다고 했다. 새벽 기지개를 켠 덕분일까. 와이퍼는 더욱 세차게 움직였다.

273

273번 버스에는 유난히 젊은이가 많다. 중랑구 차고지에서 출발해 경희대와 한국외대를 시작으로 안암, 혜화, 신촌, 홍대까지 강북의 주요 대학가를 두루 지난다. 버스를 운행하는 김태원(남·51) 기사는 노선이 넓은 도로 위주가 아니라 대학가의 좁은 길들을 따라 학교에 밀착해있기 때문에 ‘청춘’의 느낌이 많이 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중랑구에서 출발한 버스가 안암역 정류장을 지날 때쯤 좌석은 거의 차고 서서 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긴다. 통로에 서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정다혜(문과대 중문15) 씨는 반수를 해서 고려대에 입학했다. 대학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신입생이지만, 취업과 장래 걱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일 년 더 공부해 들어온 학교엔 만족하지만 사실 어문 계열이라 취업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네요. 상경계열보다 취업도 잘 안 되고 그렇다고 지금 전공에서 배우는 내용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한 학기 300만 원 하는 어학원에 다니는 느낌이에요.”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가 있을 때 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이야기를 통해 해소한다는 그는 오늘 혜화역 인근 스시 뷔페에 간다고 했다. 그의 뒤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학로에서 내리고 버스에는 군데군데 빈자리가 났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는 학생의 얼굴이 앳되다. 버스를 타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을 보면 그저 부러운 마음이라는 고등학생 이은지(여·19) 씨는 올해 수능을 치렀다. 미대 입시 준비로 홍익대 근처 학원에 가는 그는 매일 이 버스를 탄다. 대학에서 영상 예술을 전공하고 싶다는 그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피디가 되는 것이 꿈이다. 통통한 볼살에 귀여운 얼굴이지만 야무지게 다문 입술에 묻어나는 결심이 당차다.

어느새 회차 지점을 지나 종로를 지나는 버스에 학교 야구잠바를 입은 신입생 원호영(여·20) 씨가 올라탔다. 학과 홍보대사로 일하는 동시에 밴드에서 보컬을 맡고 있고 춤 동아리에서도 활약한다. 대학생활의 첫해를 바쁘게 보내는 그는 여러 가지 활동에 학생의 본분을 잊는 건 아닌지 고민이다. “곧 있으면 2학년이 될 텐데 이런저런 활동에 학업에 소홀해질까 걱정돼요.” 기자의 질문에 답하느라 하차 벨을 누르지 못해 하마터면 정류장을 지나칠 뻔한 그가 부리나케 버스에서 내린다. 듣고 싶던 답변을 강혜정(여·29) 씨가 대신한다.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시점이 대학 3학년 때 휴학하고 이런 저런 경험을 해본 거였어요. 대학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에요. 오히려 청춘을 도서관에서만 보내는 게 가장 안타까워요.”

누군가 이룬 꿈을 누군가가 꿈꾸고 목표를 이룬 사람은 더 큰 목표와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청춘의 고민이 있을 때 273번 버스를 타자. 옆에 앉은 이에게 말을 거는 게 부담스럽다면 그냥 지켜보자.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감명받을 수도, 모르는 사이 다른 누군가가 이미 그 자체로 찬란하게 빛나는 당신의 모습에 눈이 멀어 있을지도 모른다.

N15

길 위에 줄지은 택시의 헤드라이트와 정류장 옆 전광판이 환한 빛을 비추며 새벽녘 어둠을 밝힌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 정류장 쪽으로 한 버스가 다가온다. 버스 창문 너머로 얼굴을 푹 수그리고 잠든 아저씨, 헤어짐이 아쉬워 손을 꼭 붙들고 있는 커플, 그리고 스마트폰에 엄지손가락을 놀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보문역 2번 출구 옆 버스정류장, 오늘도 0시 40분이면 어김없이 도착하는 심야버스 ‘N15’가 밤길을 달린다.

정류장을 지나며 자리가 하나둘 씩 채워진다. 버스 통로까지 승객들로 가득 채워질 즈음 버스 창가엔 사람들의 온기로 얇은 서리가 뒤덮인다. 뒷좌석에 홀로 앉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던 조은혜(여·21) 씨는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두고 쉬면서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할 계획을 하고 있다. 수유역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자취방에 간다는 조 씨는 본가에 들러 옷가지와 과일을 챙겨 가는 길이다. “부모님께선 아무래도 대학에 진학하길 바라시고 저도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고 해요. 이런 고민은 주로 아는 언니 오빠들에게 털어놓는 편이에요. 충고를 하기보단 제 얘길 잘 들어주거든요. 저 이제 내릴게요.”

새벽 1시, 버스는 연극 무대 위 핀조명을 받은 듯 눈부신 실내등을 켜고 캄캄한 한강대교북단 위를 달린다. 버스 안 노란색 기둥에 달린 검은 손잡이 아래로 사람들의 어깨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주름 잡힌 바지 무릎단 위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중년의 남자가 손잡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다. 어느새 버스는 사당역을 지나 차고지에 도착했다. 2시간 내리 운전한 버스 운전기사에게 10분이란 달콤한 휴식이 주어졌다.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한 잔 뽑아 마시며 다시 운전석에 앉는다. 30년 운전 경력의 김용운(남·64) 버스 운전기사는 승객들을 보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고 말했다. “기자 학생처럼 늦은 시각에 심야버스를 타는 학생들을 보면 집에서 부모님이 걱정할 텐데 어디 갔다 이제 가는 건가 싶어요. 또 한강대교북단을 하차하는 승객들을 보면 설마 나쁜 마음을 먹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고요.” 그는 ‘아, 커피를 두 잔 뽑아올 걸 그랬다’며 멋쩍게 웃었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새벽 2시, 버스가 회차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20대 중반의 두 여성승객이 버스에 올라탔다. 박보라(여·26) 씨와 김주원(여·24) 씨는 극단 ‘여로’의 연극배우다. “22일에 있을 공연 연습을 하다가, 지금은 연극 의상을 알아보러 동대문에 가는 길이에요. 이번 연극에서 보라 언니가 입을 수수한 원피스가 필요해서요. 저번에 제 의상을 고를 때는 언니가 같이 가줬어요.” 옆에서 주원 씨의 말을 듣던 보라 씨는 연습으로 피곤했지만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하는 일의 특성상 경제적인 것보단 꿈을 좇고 있는데, 하는 일과 현실이 부딪히는 게 고민이긴 하죠. 하지만 저 말고도 이 나이 때 친구들이 다 그렇잖아요.”

새벽 3시, 큰 키에 백팩을 맨 채 버스에 올라탄 김연준(남·22) 씨는 모 대학 기계공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다. 그는 시험, 팀별 과제, 실험 등 학교공부에 치여 힘들다는 기색을 보였다. “바쁘단 핑계로 집에 자주 못 가니까 여유가 생기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편이에요. 심야버스를 종종 타는데, 배차간격이 길고 아직 노선이 다양하진 않은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심야버스 노선이 조금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보문역 하차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늦은 새벽 심야버스, 각자의 고민과 바람을 말하는 이들의 얘기가 그리 낯설지 않다. 정류장에 내려 다시 버스 창가에 어린 서리를 바라본다. 버스 밖 차가운 바람에 몸이 바짝 얼어붙는다. 버스에 모인 따뜻한 체온들이 금세 그리워진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