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이었다. 토요일이 오기도 전에 온갖 ‘갈등’이 터졌다. 민중총궐기 투쟁본부는 이번에야말로 뒤집자는 구호 아래 사람들을 모았다. SNS에도 학교 게시판에도 온갖 자보가 붙었고 집회 꽤나 다닌다는 사람들은 “이번에 가냐”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경찰은 강경대응을 강조하며 맞불을 놨다. 언론은 시위대가 쇠파이프로 의경을 가격하는 장면을 자료화면으로 내보냈고 일부 사람들은 “또 불온세력이 국가를 뒤집으려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래도 평온한 금요일이었다. 내일, 광화문에서 ‘민중’ ‘총궐기’가 있다고는 생각 할 수 없을 만큼. 강의실에서 강의실로 이동하며 다음 주의 팀플을 고민했고 일일호프가 있으니 와달라는 간곡한 부탁도 받았다. 깊은 밤, 한산한 교정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별 다른 낌새는 없었다. 그냥 그런 금요일, 요란한 건 “다치지 말라”는 걱정어린 연락이 끊임없이 울리는 휴대폰뿐이었다.

▲ 사진|장지희 기자 doby@

분노한 청년, 대학로에 서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부슬비의 답답한 냄새가 창틀 너머 방 안까지 스며들었다. 억지스러운 스산함을 향해 문을 나서니 총궐기에 같이 가는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정경대는 정대후문에서 모인대. 비 내리는데 우산 말고 우비 챙겨와. 나중에 최루액 맞을 때도 그게 더 편할거야.” 젖어도 되는 옷, 찢어져도 괜찮은 외투를 걸친터라 괜히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근처 편의점에 들러 가판대에 남아있는 마지막 우비를 챙겼다. 비가 내리는 탓인지 무엇인지 교정은 어제 밤보다 더 한산했다. 정경대 후문에 다다랐더니 20여 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한 손에는 우비를 든 채, 한 손에는 피켓을 든 채. 그렇게 대학로로 향했다.

대학로에서는 ‘헬조선 뒤집는 청년총궐기’가 열린다고 했다. 광화문 주위의 여러 공간에서 집단별로 일차적인 총궐기를 가진 후 광화문으로 집결한단다. 어느 대학교 총학생회, 어느 대학교 네트워크의 깃발이 점점 혜화역 2번 출구 옆으로 모여들더니 어느새 2차선을 100m 가까이 채울 만큼 청년이 모였다. 2천 명은 족히 되는 숫자였다. 극장이 즐비한 혜화역 주변을 지나던 ‘청춘’들은 모여든 ‘청년’이 신기하다는 듯 휴대폰 카메라를 들었다. 재빨리 그 공간을 벗어나고자 네 살 남짓한 아이의 손을 잡아끄는 부모도 있었고 못마땅한 눈빛으로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적어도 이 숫자면 창피하진 않겠구나 싶었다.

오후 2시, 임시로 세워진 무대를 향해 앉았다. 서로의 과잠에 새겨진 이니셜은 달라도 같은 어려움을 겪고 같은 분노를 느꼈기에 하나의 목소리를 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호황기를 누려본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누구 하나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고,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불황기였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더 참아야 호황기가 오는거냐”는 질문에 모두가 환호했다. 가만히 있다간 지금보다 더 암울한 미래가 다가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비가 그쳤다. 4시를 살짝 넘긴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화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겨야했다. 각 단위에서 한명씩 자원봉사자를 뽑아 뒷정리를 맡긴 후 종로 5가로 나섰다. “여러분, 부디 단 한분도 다치지 마십시오!” 스피커에서 마지막으로 울린 목소리였다.

 

행진부터 해산까지

대오의 제일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방송차에서는 끊임없이 구호를 이끌었다. “국정교과서 철회하라!” “청년일자리 보장하라!” “노동개악 중단하라!” 얼마나 목소리를 내질렀던지 머지않아 쇳소리가 났다. 거대한 목소리로 종로 일대를 뒤덮으며 차로를 한가운데를 걸어가니 눈길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누군가는 수군댔고 누군가는 박수를 쳤다. 종로 3가를 지날 때, 건너편 인도에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이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다. “너희들이 뭘 안다고 그러냐! 빨갱이 새끼들한테 선동당하고 잘들 한다!” 무어라 더 외치는 듯 했지만 이내 구호가 시작되며 ‘훈수’는 묻혔다. 그 후로 목소리를 더 크게 냈다. 목을 가혹하리만큼 긁어댔다.

종각역에 다다른 오후 4시 50분, 광화문 일대가 차벽으로 가로막혀 여기서 대기해야 한다는 설명이 들렸다. 걸어서 10분 거리인 광화문을 눈앞에 두고 우선은 앉았다. 같이 걸어온 얼굴들을 돌아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갔다. 친구 한 명이 광화문을 뚫기 위해 선발대로 나섰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누군가가 쓰러졌다는 소식도 들렸다. 당장 눈앞 저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묶인 사이, 누군가는 싸우고 누군가는 쓰러졌다.

대기가 길어지더니 6시를 넘겼다. 갑작스럽게 우선 해산한다는 공지가 나왔다. 각 단위별로 알아서 광화문으로 향하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우왕좌왕 하는 사이 다른 단체는 대부분이 빠져나갔다. 아무도 설명을 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일부 학생들은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졌다. 우선 차로와 인도는 모두 막혔으니 지하철 광화문역으로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하철을 탔다. 광화문역에 이르자 방송이 나왔다. “대규모 집회 관계로 광화문 역에서는 정차하지 않습니다.” 황량한 광화문역을 지나고, 결국 내린 곳은 서대문역이었다.

▲ 사진|장지희 기자 doby@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대문역 5번 출구로 나와 근처 인도에 모였다. 바로 뒤편 사거리에서 경찰들이 무전을 하며 교통통제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일단 광화문으로 향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두 명씩 손을 잡았다. 혹시나 경찰과 충돌이 발생할 때 혼자 끌려가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뒤편 경찰의 눈치를 살피다 그들이 서있는 반대편 거리로 기습적으로 나섰다. 경찰은 무전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했지만 이미 대오는 이화여고쪽 골목으로 들어선 후였다.

방송차는 없었지만 구호는 계속 외쳤다. 200명 남짓의 목소리였지만 골목을 울리기엔 충분했다. 누군가가 선창하면 모두가 따라 외치며 7시를 맞았다. 덕수궁 옆 돌담길에서 주한미국대사관저 골목을 지키는 경찰을 비켜가며, 대오는 마침내 시청역에 이르렀다. 광화문 방향으로 시선을 틀자 곧바로 보이는 이순신 장군상, 그리고 그 앞의 거대한 차벽. 직접 본 차벽은 고속도로의 소음벽과 같은 모양으로 굳건히 서있었다. 그 위로는 500m 거리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물대포가 시위대를 향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종교인연합, 농민단체 등의 각종 깃발이 세종대로에 나부꼈지만 여전히 광화문을 밟은 이는 없었다.

차벽으로 향했다. 그곳에도 방송차는 있었다. 높이 치켜든 깃발을 봤는지 방송차는 우리에게 앞으로 나설 것을 요구했다. “학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투쟁 한번을 외칠 때마다 한 발짝씩 앞으로 나가겠습니다!” 그렇게 차벽 앞으로 다가서자 물대포가 서서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우비를 꺼내 입었다. “온다!”라는 소리가 들릴 때 등을 돌렸다. 물대포에서 나온 최루액이 정확히 등에 맞았고, 쏴, 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 힘에 떠밀려 휘청였다. 등줄기를 타고 바닥에 떨어진 최루액은 하얀 기포를 내며 부시식거렸다. 매운 기운이 확 밀려왔다. 미처 등을 돌리지 못한 사람들은 얼굴에 직사로 물대포를 맞고 연신 콜록였다. “얼굴에 손 대지마! 더 매워져!”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물로 씻어내기도 전에 물대포는 다시 우리를 향했다. 바닥은 온통 하얀색 기포로 덮였고 기침소리와 함성이 정신없이 뒤섞였다. 꼼짝 않는 차벽 위로 물대포는 고개를 까딱, 까딱, 거리며 다음 조준상대를 찾고 있었다.

일선에서 한 시간여를 버티다가 우선 뒤쪽으로 빠졌다. 휴식을 취하고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 다시 차벽으로 향했지만 다행히 물대포는 발사되지 않았다. 밧줄로 차벽을 당겨 조금 틀어진 사이로 경찰들이 방패를 들고 시위대의 광화문 진입을 막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방송차에서는 더 이상 “투쟁!”이 들리지 않았다. “지도부가 이미 후퇴했다”, “곧 경찰의 진압이 있을거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미 아무도 없었다.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친구에게 이끌려 차벽 반대편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세종대로 좌우로는 이미 경찰 병력이 진압명령 대기 중이었다. 300m 넘게 자리 잡은 경찰이 양 쪽에서 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숨이 막혀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여전히 차벽 앞에는 청년들이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빠져야 한다고, 이제는 위험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나 역시 거리를 빠져나가며 그들을 돌아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경찰이 들어선 양 쪽으로 시선을 돌릴 용기도 나지 않는 상황에서 도망치듯 거리를 빠져나왔다. 정신을 차리자 11시 30분, 시청이었다.

지하철로 돌아오는 길, 왜 나왔고 뭘 했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찰 차벽을 끝까지 마주했던 그들은 무슨 대답을 할까.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부끄럽진 않았노라, 그 한마디라도 할 수 있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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