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 <사도>와 <역린>부터 인기 드라마로 종영한 <이산>까지 정조 시대의 이야기는 대중문화콘텐츠에 자주 등장하는 인기 소재다. 여기 정조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다. 조선 시대 왕의 일기인 <일성록(日省錄)>의 정조대가 완역돼 이를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쉬운 길이 열렸다.

한국고전번역원은 ‘한국 고전번역 50년과 <일성록> 정조대 완역’을 기념해 4일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조광(문과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의 기조강연에 이어 여러 전문가가 주제 발표와 토론에 나섰다. 이들은 국가기록물로서 일성록의 가치를 평가하고 향후 번역과 연구 방법 등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펼쳤다.

▲ 사진|서동재 기자 awe@

일성록의 가치와 중요성

<일성록>은 1760년부터 1910년까지 151년 동안 날마다 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국가 기록물이다. 전체 2329책 중 현재까지 677책이 번역됐으며, 왕의 사후에나 공개되는 실록과 달리 국정 진행 상황을 곧바로 파악하기 위해 정조 세손 시절에 만들어졌다. 「<일성록>은 조선왕조가 산출한 기록물 중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함께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유산 중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초기 <일성록>은 세자였던 정조 자신의 학업에 대한 사적 기록이 주를 이뤘으나, 정조가 국왕의 언행이 갖는 공적 성격을 인식하고 <일성록>의 작성 범례를 확정해나가며 공적 기록물로 전환했다. 이는 역사의 감계(鑑戒)와 감고(鑑古)의 역할을 했으며, 이후 역사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일성록」은 고거(考據)에 있어 상대적으로 편리하게 편찬된 역사서로 사료의 양이 방대하고 강목체로 쓰였다는 특징이 있다. 비교되는 국가기록물에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이 있다. 조광(문과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조선왕조실록은 당시 편찬자의 호불호나 집권세력 간의 이해관계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실록을 편찬하는 기준과 편찬 정신에 변화가 일어나 매우 간략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록에 입전된 기록에 특별한 경향성을 가지고 취사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첨삭이나 왜곡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승정원일기> 또한 국왕이 반출해 열람할 수 있었던 기록물로, 개수된 부분이 많다. 조광 명예교수는 “당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첨삭이 이루어져 이 기록으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는 데에는 좀 더 신중을 기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일성록>은 강목체로 편찬 돼 다른 기록물보다 전산화에 유리하고 검색과 활용에 편리한 측면이 있다. <일성록> 안의 △인사 △회계 △인구 △형옥관계 기록 등이 일정한 규칙 하에 기술돼 있어 이를 전산화해 조선후기사 연구에서 빅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일성록>은 당시 조선사회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일성록>은 국내의 구체적인 민생문제뿐 아니라 19세기 조선을 중심으로 해 전개됐던 국제적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역사 연구방법과 편찬체계

발표자인 오수창(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상이하(上而下)의 역사 연구와 정조연간 연구의 방향 모색’을 주제로 발표했다. 오수창 교수는 앞서 말한 3개의 조선왕조 국가기록물을 이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한국사 연구자들이 연구시각과 영역을 확대해 정조 연간 자료를 체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대개 역사 연구가들이 앞선 시대의 역사적 상황의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상이하의 방법을 택하지만, 현재에서 과거로 역사가의 시선이 올라갈 수밖에 없음을 고려한다면 ‘하이상(下而上)’의 방식이 더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두 개의 연구방법을 병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두 번째 연사로 선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일성록> 편찬과 조선의 국사 체계’에 대해 발표했다. 조선 시대 문치주의의 실현을 위한 제도이자 문화적 성과 중 하나로 운위되는 것이 사관제도인데, 조선왕조실록이 그 산물이다. 오항녕 교수는 조선 후기에 실록을 중심으로 한 국사체계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고 말했다. 실록의 수정이 계속되며 실록 수정의 긍정성은 퇴색하고, 실록 편찬의 당파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자리 잡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편찬의 공정성에 대한 회의로부터 사관의 사초를 경시하는 풍조로 전이되었다. 오항녕 교수는 이는 조선 사관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오 항녕 교수는 “사초 작성을 담당하는 주체인 사관 선발을 자천제에서 권점제로 바꾸면서 사관을 관료제의 위계로 완전히 편입시켰다”며 “사관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약화되며 그들의 실질적인 위상도 약화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실록의 변화는 실록 찬수범례에서도 알 수 있다. 정조실록 편찬부터 실록의 찬수범례 대신 새롭게 27개 항의 찬수범례를 택했는데, 이는 일성록 찬수범례를 준용한 것으로 실록 중심의 국사체계가 일성록 중심의 국사체계로 변화하는 조짐을 보여준다. 오항녕 교수는 “사관의 위상과 역할이 위축되며 실록 편찬이 부실화되고 실록의 범례도 일성록을 따르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대안을 모색해야 했다”며 “모색된 대안은 규장각 각신(閣臣)의 사관화와 정조와 각신들에 의한 일성록 편찬이었다”고 말했다.

일성록이 번역되기까지

<일성록>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1998년에 시범적으로 정조대 일성록 1책의 번역을 시작해 올해 비로소 정조의 세손 시절 기록인 영조대 8책과 정조 재위 기간의 기록인 185책, 모두 193책을 완역하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김옥경 일성록 번역팀장은 세 번째 발표자로 나서 ‘<일성록> 번역 현황과 과제’에 대해 설명했다. 김옥경 일성록 번역팀장은 “일성록은 강목체의 기록 체제상 축약된 문장이 많아 승정원일기와 대조해 교감하는 것이 기본원칙”이라며 “다른 자료도 참고해 번역해야 하는데, 개수본은 더 철저하게 검색해 교감해 자료적 한계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2013년 2~3인의 공동번역조가 좌장의 주도로 원고를 윤독하고 자문과 교열을 받는 ‘공동번역제도’를 도입했다. 일성록 번역팀은 2013년도에 연구원과 번역위원 각각 공동번역조 1개 조로 시작해 올해 3개 조까지 확대했다. 일성록 번역팀은 이를 통해 번역 품질의 향상과 번역원의 내부 번역 역량을 다지고자 했다. 또한 번역 평가 시스템의 개선을 통해 역자의 원고에 대한 책임감을 강화하고 고품질의 번역원고를 확보해 평가에 들어가는 인력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끝으로 김옥경 팀장은 “현재 역사문헌 번역의 전문가 양성이 시급하며, 기존 번역위원의 처우가 개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화콘텐츠로의 활용 기반 조성돼

<일성록>은 그동안 원문이 난해해 자료이용에 어려웠지만, 정조대 완역을 계기로 전문연구자는 물론 대중이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데 쉽게 접근할 기반이 조성됐다. 정조대 완역은 학술적 성과를 거둔 것뿐 아니라 대중이 자유롭게 읽고 편리하게 활용하게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토론에 참여한 본교 한자한문연구소의 김광태 연구교수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일성록의 원문텍스트는 전혀 가공되지 않아 연계된 번역문과 비교해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웹서비스를 통해 대중이 일성록,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을 문화콘텐츠로 접근하는 기반은 조성됐지만, 번역문과 비교해 보기 어려워 실질적인 활용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김옥경 일성록 번역팀장도 원문에 기호 구현이 돼 있지 않고 번역문과 일치되지 않는 점이 있어 보완 할 방법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짧게 답했다. 끝으로 김옥경 팀장은 “정부의 예산지원이 저조하고 번역에 참여하는 전문 인력이 부족했지만 일성록은 실록과 승정원일기와 변별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고 확신했다”며 “양질의 번역 성과와 더불어 이 번역서가 앞으로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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