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12월 30일 '제1211차 수요시위'에서 이화여고 합창단이 추모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ㅣ서동재 기자 awe@

2011년 12월. 일본대사관을 마주 보는 자리에 소녀가 앉았다. 까치발로 앉은 소녀의 모습이 외로워서였을까. 소녀의 옆으로, 매주 수요일마다 사람들이 모였다. 매번 다른 얼굴이었지만 그들은 소녀를 대신해 목소리를 냈다.

2015년 12월. 한·일위안부협상에 소녀의 자리는 없었다. 과정도 내용도 석연찮은 그 협상을 두고 정부의 대표들은 최선이라 주장했다. 말이 없는 소녀 옆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단발머리 소녀의 머리엔 모자가, 목엔 목도리가, 그리고 그 주변엔 꽃들이 놓여 있었다.

“이리로 오세요.” 12월 30일 ‘위안부’ 소녀상 앞에 1000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하나의 차선에 나란히 앉은 그들은 다닥다닥 붙었지만, 찡그린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무전기와 호루라기 소리. 이를 묻어버릴 것만 같은 시민들의 구호. 소리는 점점 커졌다.

인파의 중심에는 할머니 두 분이 있었다. “매번 고마워.” 짙은 노란색 조끼를 입은 학생들의 손을 잡으며 이용수(여·89) 할머니가 나지막이 말했다. 길원옥(여·89) 할머니의 오른쪽 가슴엔 노란 나비 배지가 빛났다. 살을 짓이기는 듯한 매서운 바람에도, 그 누구도 등을 돌리진 않았다.

1211차 정기 수요시위는 촛불 점화식으로 시작됐다. 이날은 2015년 돌아가신 9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추모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식이 시작되고 사람들은 침묵했다. 입꼬리는 내려갔고, 눈은 또렷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故 이효순 할머니의 아들 이동주 씨가 단상에 올랐다. 그는 어머니의 사진을 지그시 바라보다 청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꿈에서 만난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을 기억합니다. ‘모진 세월 죽지 못해 살아왔는데, 나를 잊지 말고 끝까지 싸워 이길 것을 약속해 달라’고 하셨지요.” 이 한마디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약속할게요. 싸워서 이길게요. 어머니,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뒤이어 마이크를 잡은 이용수 할머니는 12월 28일 한·일위안부협상에 분노했다. “24년간의 나, 외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죄를 짓고도 죄를 모르고, ‘타결했다’, ‘해결했다’는 정부의 발표는 나를 두 번 세 번 죽입니다.” 그는 귀가 먹었으면 귀를 뚫고, 눈이 멀었으면 눈을 뜨게 할 것이라고 했다. 중간중간 울컥거리는 마음에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무언가 차오르는 듯 할머니는 목소리를 떨었다. “내 나이 88세가 뭐 그리 많습니까. 활동하기 딱 좋은 나이입니다.”

이 말에 응답하듯 사람들은 일본대사관을 향해 피켓을 들었다. 바닥에 앉아 고개를 들어 올린 그들은 저 높은 대사관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하나의 거대한 목소리가 하늘을 관통할 듯 울렸다. 굳게 주먹을 쥔 채 목청껏 외치는 학생들도 보였다.

“배상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오노쿄코(小野今日子, 여·53) 씨의 말에도 단호함이 묻어났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20년간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그는 부끄러움을 이야기했다. “일본 정부는 오랜 시간을 들여서라도 피해자 당사자에게 올바른 방법으로 사죄하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시위의 시작과 함께했던 촛불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불현듯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잠시 휘청일 때도 있었지만, 끝끝내 꺼지진 않았다.

촛불 앞으로 노란 머플러를 한 고등학생들이 단상에 올랐다. 노랫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져 메아리가 되기도 전, 사람들은 손을 맞잡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코끝이 빨개지도록 차가운 공기. 촛불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의 한 얼굴 한 얼굴 너머, 저마다의 목소리로 노래가 울려 퍼졌다.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속에 사무쳐 우는 갈라진 이 세상에

민중의 넋이 주인 되는 참 세상 자유 위하여

시퍼렇게 쑥물 들어도 강물 저어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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