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제 아래의 국민은 투표할 때만 자유롭고, 의원이 선출되면 다시 노예로 전락한다고 루소는 말했다. 그의 지적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에도 유효하다. 한국행정연구원이 국민 7500명을 대상으로 한 2014년 기관별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국회를 ‘믿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은 82%에 달했다.

지난 5월 스페인에서는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시민정치연대 ‘아호라 마드리드’의 후보자가 마드리드 시장에 당선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러한 정치적 실험의 성공에 따라 대의제에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려는 초기 단계의 국내 움직임들이 주목받고 있다.

▲ 종암동 마을계획단 사전 교육이 종암동주민센터에서 진행됐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정보접근권 실현

시민들의 정치참여 수단으로 이용되는 온라인 플랫폼을 개발하려는 시도는 정보화 시대가 도래한 만큼 ICT 기술이 보편화됐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시민의 집단적 이성과 합리성을 신뢰할 수 없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신재혁(정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생업에 종사하는 다수 시민들이 정책결정에 필요한 전문성과 시간을 갖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이러한 지적을 극복하기 위해, 이용자들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의제에 대한 판단을 하도록 돕는 플랫폼이 개발되고 있다. 지난 8월 설립된 정치연구벤처 ‘와글(WAGL)’과 온라인 기반의 사단법인 ‘시민의 날개’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온라인 플랫폼을 연구하고 있다. 이진순 와글 대표는 “많은 사람들이 대의제와 다수결의 원칙을 충족시키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오해한다”며 “구성원의 다양한 목소리를 최대한 투명하게 반영할 플랫폼을 소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의 날개 플랫폼은 정책에 대해 토론, 제안, 의사결정을 하는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다. 정보접근권의 실현을 위해 시민들이 직접 뉴스에 중요도를 부여하고 진실성의 여부에 따라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시민주도형 미디어도 운영하고 있다. 김하범 시민의날개 집행위원장은 “기득권 정치세력의 의도에 따라 정보가 숨겨지고 왜곡됐던 역사적 경험에 비춰볼 때, 정확한 정보의 유통은 시민정치 플랫폼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더 나은 민주주의 플랫폼을 만드는 개발자들 모임(이하 개발자모임)’이 개발한 플랫폼 ‘카누’는 누구나 이슈를 제안할 수 있고, 유사한 생각을 가진 사용자끼리 연결되도록 설계됐다. 권오현 개발자모임 대표는 “기술적 한계가 직접민주주의적 시민참여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다”며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의식에 따라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출발한 개발자모임은 기술적인 장치를 점차 개발해 더 나은 토론과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권한 부여돼야 시민참여 늘 것

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플랫폼에 참여하고, 이렇게 모인 이들이 제도권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정당과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이 플랫폼을 공식적인 운영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이진순 와글 대표는 “온라인 플랫폼이 성공한 해외 사례를 보면 실제로 ‘권한’이 부여됐다는 특징이 있다”며 “시민들이 결정한 대로 비례대표 순번이 정해지고 시의회에 안건이 상정된다면 많은 이들이 참여하게 된다”고 말했다. 김하범 집행위원장 역시 많은 사람들이 시민정치가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공’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김 위원장은 “결과 없는 서명운동과 반응 없는 청원은 시민들을 지치게 한다”며 온라인 정치플랫폼을 통한 지속적인 변화의 경험을 강조했다.

성북구 마을민주주의의 일환으로 시행되고 있는 주민참여예산위원회가 그 사례다. 주민참여예산위원회에는 법적, 제도적 권한을 부여하고 있으며, 월곡2동과 길음1동에서 실시되는 마을계획 제도는 모든 주민들이 직접 예산을 배정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국민발안제 요구하는 목소리 커져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시민참여정치가 직면한 과제는 실질적인 권한이 부여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회민주주의에서 영향력을 가진 정당들은 이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국민발안 등을 제도화해 대표자에게 독점돼있는 권력을 분산시키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국민발안은 대표자가 국민이 원하는 입법을 하지 않는 경우 국민이 직접 안건을 발의하는 것으로, 1972년 유신헌법의 도입과 함께 폐지됐다. 현재는 2004년 주민투표법의 제정에 따라 주민발안만이 가능한 상황이다. 국민주권을 확대하도록 하는 조항을 개헌안에 반영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국회와 시민사회계 모두에서 존재한다.

500만 명 이상의 국민이 서명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운동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200일 이상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자, 시민사회는 개헌의 필요성을 다시금 강조했다. 이기우(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세월호 사건 직후 작동불능 상태였던 국회를 보며 국민발안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생겼다”고 말했다.

2015년 6월 출범한 시민단체연합 ‘시민이 만드는 헌법 추진위원회(이하 시민헌법)’은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어 정당, 시민단체와 연대해 새로운 헌법 개정안을 작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국민투표 발의대상을 국민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법률이나 조약 등으로 확대해 국민주권을 확대하자는 것이 이들의 핵심 주장이다. 김덕룡 시민헌법 대표는 “지난 1987년 개헌안은 기득권 사이의 권력구조를 조정하는 것에 집중돼 국민과 권력을 나누는 것에는 소홀했다”며 “시민헌법은 개헌을 정치권에만 위탁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공사례라도 국가 간 차이 고려해야

협력적 의사결정 플랫폼 ‘루미오’, 의회안건에 대해 토론과 표결을 진행하는 정치플랫폼 ‘데모크라시 OS’ 등 해외 플랫폼이 오픈소스를 기반으로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데모크라시OS를 활용해 정책공약과 윤리공약을 정한 시민주도적 정치연대 ‘바르셀로나 엔 꼬뮤(Barcelona en Comú)’는 정치적 경력이 전무한 풀뿌리 시민운동가 아다 콜라우(Ada Colau)를 당선시키는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개별 국가들의 정치공학적, 문화적 차이에 따라 이러한 플랫폼의 성공여부는 달라질 수 있다. 온라인 플랫폼은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을 돕는 도구적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데모크라시 OS는 15개국에서 이용됐지만, 최초로 개발된 아르헨티나의 총선에서는 1%의 득표율을 얻는 저조한 지지를 받았다. 와글 연구개발자 서정규 씨는 “한 국가의 시민이 시민발의에 더 익숙한지 양당제를 깨고 새로운 정당을 지지하는 데 익숙한지 등에 따라 성공적인 시민정치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며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뤄지고 있는 새로운 실험들도 이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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