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조현제 기자 aleph@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되다
  작년 11월, 이한성 새누리당 의원은 ‘본인의 생전 반대 의사가 없는 한 무연고 시신을 해부용 시체로 제공 가능하다’는 내용의 ‘시체 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내놓았다. ‘무연고 시신은 생전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해부용 시체로 제공할 수 있다’는 동법 12조 1항이 위헌이라는 헌재 판결에 대해, ‘생전 반대 의사가 없는 한’이라는 제한규정을 슬그머니 추가한 것이다. 아마도 거리의 노숙인들에겐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 조차 사치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위 사례는 거리노숙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노숙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수많은 노숙인 관련 논의가 있어 왔고, 지난 2011년에는 노숙인의 인권 보호와 복지증진을 위한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까지 했다. 그래도  여전히 노숙인을 ‘제거 혹은 격리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이며, 왜 지속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생산(혹은 발명)되는 것이다
  서울역 광장에 두 명의 사람이 있다. 한 명은 남루한 행색의 청년으로 술에 취해 벤치에 누워 있고, 다른 한 명은 말끔한 차림의 중년 남성으로 벤치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다. 둘 중 누가 노숙인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자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모습이야말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노숙인의 고유한 특성이자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즉 노숙인은 ‘더럽고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더럽고 이상해야만 하는’ 사람인 셈이다.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생산’하고 ‘발명’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용가치(use value)'보다 ‘교환가치(exchange value)’를 중요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노숙인과 비노숙인의 차이는 극명하다. 거리에서 모든 생활을 영위하는 노숙인의 경우 비노숙인과 달리도시공간을 철저히 ‘사용가치’로 전유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의 논리는 체제 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노숙인을 배제의 대상으로 재생산해내기에 이른다. 심지어 이러한 배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노숙인의 특정 단면만을 부각시켜 그 것을 노숙인의 대표 이미지로 낙인찍는다. ‘노숙인은 더럽다’, ‘노숙인은 일을 하지 않는다’, ‘노숙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등이 대표적 예다.

 

공공 공간은 편 가르기를 반복한다
  거리노숙인들은 대부분 공공 공간에서 생활하는데, 여기서 공공 공간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오로지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에게만 허용되는 배타적 공공성으로 개념화 되어 있을 뿐이다. 즉 자본주의 체제가 장악한 공공공간은 공간 이용자들에게 특정한 방식과 규칙, 그리고 자격을 요구하며, 이를 충족시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구분한다. 이 때 노숙인은 후자에 해당하며, 그렇기 때문에 공공공간으로부터 공공성을 보장받기는커녕 오히려 공공성의 미명 하에 추방되고 격리된다.

  ‘차이’가 ‘차별’적으로 용인되는, 그래서 ‘다름(difference)’이 ‘틀림(wrong)’으로 간주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숙인과 비노숙인 간 수평적 소통은 불가능하다. 공공 공간을 사용가치로 전유할 수밖에 없는 노숙인은 자본주의 체제에 정면으로 반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노숙인이라는 주체는 애초부터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규정되어 진다.

 

헤테로피아를 꿈꾸다
  필자가 ‘현장은 늘 옳다’는 소신 하나로 무작정 서울역 노숙을 감행했던 게 벌써 6년 전이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노숙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 그리고 공공 공간에서의 노숙인의 위치성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노숙인에게 집이나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구조다. 오늘날 우리는 이승복 열사의 외침을 ‘대책 없는 주장’으로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숙인에 대한 사회적 ‘위치짓기’를 해체하려는 시도는 유독 ‘현실성 없는 이상적 주장’으로 폄하되곤 한다. ‘상식’을 거부한다고, ‘동일성의 원칙’을 깨고 ‘차이’를 드러내려 한다고 사회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제되곤 하는 이 모습이, 바로 현대사회의 자화상인 셈이다. 이제부터라도,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대한 재성찰을 꿈꿔 본다.

 

김준호 한국관광개발연구원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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