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대학교 교문 앞에서 학생들과 공수부대가 대치하고 있다.
▲ 계엄군이 곤봉으로 학생을 진압하고 있다.
▲ 운수 노동자들은 각자의 자동차를 끌고와 시민들과 함께 투쟁했다.
▲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가 광주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
▲ 5.18 당시 도청과 그 건너편 상무관에는 '임시 희생자주검 안치소'가 있었다. 사진제공 | 5.18 기념재단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유신정권은 종말을 맞는다. 그로부터 2개월도 지나지 않은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위시한 군내 강경파는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17일
당시 전국 대학생들은 1980년 봄, 학생회 부활운동을 시작으로 학원민주화투쟁과 계엄해제, 유신잔당의 퇴진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1980년 5월 17일.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이에 따라 전국 31개 대학에 계엄군이 배치됐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의 최초 도화선은 자연 발생적이었다. 1980년 5월 18일 전남대 교문에는 완전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가 교문을 통제하고 학생들에 대한 귀가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300여 명의 학생은 농성을 시작했다. 산발적이었던 시위는 오후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조직적으로 변해 갔다. 오후 3시경, 시내에 투입되기 시작한 공수부대는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 진압봉을 휘둘렀고, 그렇게 유혈극은 시작됐다.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

1980년 5월 19일
하루가 지난 19일 광주는 여느 때와 같았지만, 조금은 변해있었다. 초‧중‧고등학교는 정상수업을 했고 관공서와 기업도 정상근무를 시행했다. 하지만 상가들은 문을 닫았고 전 지역에 걸쳐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를 섰다. 오전 10시 금남로에 모인 시위자는 첫날과 달리 학생 아닌 시민이 대다수였다.

1980년 5월 20일
19일 저녁부터 내리던 비는 20일 오전에서야 멈췄다. 당시 계엄군 내에서도 불협화음은 존재했다. 무혈진압을 명령했던 공식적 계엄군 상급지휘자인 정웅 소장은 소외됐고, 대신 정호용 특전 사령관이 현지의 공수부대를 지휘하면서 체계가 이원화된 것이다. 그렇게 20일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총원은 3400여 명이었다. 비가 멈춘 오후의 금남로는 다시 최루탄으로 자욱했다. 이날 운수노동자들은 영업을 중지하고 나섰다. 200여 대의 자동차가 시민들의 투쟁대열에 동참했다. 그때부터 광주항쟁은 전면적인 민중봉기의 성격을 띤 것이다. 그날 밤, MBC, KBS 방송국과 세무서가 불에 탔다. 이렇게 시위가 격렬히 확대되자 군은 시외로 통하는 교통‧통신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21일
그럼에도 시위는 끝이 날 줄 몰랐다. 21일 오후 1시 도청광장. 갑자기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에 맞춰 총성이 터졌다.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집단발포가 시작된 것이다. 진압봉과 최루탄이 무기였던 이전까지의 공격과는 달랐다. 이에 시위대는 나주, 목포, 영암 등 시외로 빠져나갔고, 무기를 탈취해왔다. 처음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탄생했고, 그렇게 끝이 보이질 않던 계엄군은 퇴각했다.

1980년 5월 22일
다음날, 시민들은 물러간 공수부대를 눈으로 확인하고자 도청 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승리감에 차있었으나 해야 할 일은 남았다. 시내 치안을 유지하는 것과 계엄군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유지급 인사들은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했고 계엄사 측과의 협상을 담당했다. 같은 날 학생 중심의 ‘학생수습대책위원회’도 만들어져 실질적인 대민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곧 수습위는 둘로 갈려 대립하기 시작했다. 계엄사가 요구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무장해제를 요구했던 것이다. 시민수습대책위는 무기를 반납하자고 주장했고, 학생수습대책위는 무장해제를 거부했다. 학생수습대책위 내부에서도 “무기 일부를 반납하고 시민요구사항을 협상하자”는 온건파가 있었지만, 이후 주도권은 학생수습대책위 내 강경파가 잡았다.

이로써 항쟁지도부는 다시 탄생했다. 이는 학생수습위 강경파와 청년운동권, 무장투쟁에 참여했던 기층민중이 중심이 됐다. 이 항쟁 지도부가 다시 계엄군과 맞붙었던 건 27일 새벽이었다.

1980년 5월 26일
26일 계엄군이 다시 진출하고 있다는 무전이 왔다. 곧이어 YMCA엔 도청항쟁지도부의 150명과 시민군이 모였다. 그들은 주요 지점에 배치돼 다가오는 계엄군에 맞설 준비를 했다.

1980년 5월 27일
27일 새벽, ‘상무충정작전’이라 이름 붙인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개시됐다. 새벽 4시쯤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향해 훤히 비췄다. 이윽고 항복을 권유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교전은 계속됐다. YMCA, YWCA, 계림초등학교 등은 빠르게 진압됐고, 도청을 마지막으로 최후의 항전은 끝이 났다. 작전 개시 1시간 반 만이었다. 그로써 열흘간의 무장투쟁도 막을 내렸다.

한밤중의 적막을 가르며 애절한 목소리가 광주를 깨우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참고 | 광주광역시 5.28 사료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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