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15일 본교 총학생회를 비롯한 여러 학생 단체가 광주를 찾았다. 대학가의 기행 외에도 광주를 기억하려는 노력은 교육계, 문화계 등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매년 찾아오는 5월의 행사를 보며, 2010년대를 사는 우리는 당시를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의 부모, 1980년대를 살았던 그들은 당시를 회상한다.

우리와 그들에게 광주민주화운동은 어떤 의미를 던져줬을까. 조금은 떨어진 시간에서 20대를 보냈던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시대를 살았던 걸까. 5.18 민주화운동 역사기행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전누리(정경대 정외13) 씨와 그의 어머니 김지나(여·47) 씨, 20대였던 1980년대에 민주화 집회에서 민중가요를 불렀던 김영남(간호학과 87학번) 교우와 그의 아들 최명하(공과대 기계공학15) 씨와 좌담회를 진행했다.

▲ 13일, 딸과 어머니, 아들과 어머니가 모여 5.18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장 왼쪽부터 김지나(여·47), 전누리(정경대 정외13), 본지 기자, 최명하(공과대 기계공학15), 김영남(간호학과 87학번). 사진 | 서동재 기자 awe@

-‘광주항쟁’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딸 | 투쟁이다. 평범한 시민들이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한 상황에서 대항했던 만큼 투쟁이란 단어에 가장 적합한 운동이었다.

딸 어머니 | 킬링필드가 생각났다. 처음 광주를 접한 것은 중3때 성당에서 진행한 5.18 사진전에서였다. 충격에 휩싸여 ‘이게 우리나라라고?’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들 어머니 | 뉴스를 열심히 보는 편이었는데, 그땐 “광주 시위 세력은 북한에서 남파시킨 폭도들이고 전두환 대통령이 훌륭히 해결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와 당시 외신 기자들이 찍은 사진을 보게 됐는데 그때 국가에게 속았다는 배신감이 들었다.

- 광주민주화운동이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체감하시나.
아들 어머니 | 6월 항쟁에 참여했던 내게 당시 5.18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광주를 처음 접했을 때,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살았는데도 당시 상황을 몰랐다는 것에 대한 부채감이 컸다. 그리고 그로부터 느낀 것은 크게 2가지였다. 첫째, ‘국민의 힘으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 둘째, ‘민주주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그런 면에서 광주는 완전히 실패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민주주의 정신을 알려주고 행동할 수 있는 추진력을 줬다.

딸 | 5.18의 영향을 받아 6월 민주항쟁 이후 민주화가 공고화됐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린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예전보다 나아졌으면 된 것 아니냐’고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이름으로 고통받고 있다. 아직도 국가 폭력이 자행되는 것을 보면 광주 민주항쟁이 시사하는 바는 크지만, 그 정신을 사람들이 제대로 이어받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 5.18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딸 | 광주가 어떤 공간이었는지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그 정신을 기려 현시대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다.

아들 | 대학생들이 나서 사회운동을 하는 빈도가 낮아진 지금, 추모 자체로도 큰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5.18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과거와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게 ‘5.18을 기억한다는 것’은 ‘5월 18일’ 날짜를 기억하는 것에서 벗어나, 광주민주화운동에 관심 없는 사람들의 인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딸 어머니 | 5.18은 거창한 기념식이 아니다. 그래서 살다 보면 이날을 문득 잊어버리는 날도 오고, 예전과 달리 수동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5월이 다가오고, ‘광주’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아 맞다’라는 생각이 든다. 억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날 직접 접하고 충격을 받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젊은 날에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었지.’하며 지금의 상황에서 그때의 정의로움을 다시 실현하고자 다짐하는 시간을 갖는다.

- 5.18 저항의 발단이 학생시위였던 걸 생각하면, 지금 20대의 행동성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아들 어머니 | 그 사안에 대해선 우리 세대의 탓도 있는 것 같다. 굳이 원인의 방향을 설정할 필요는 없지만, 잘 지켜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은 남아있다. 운동하는 학생들에 대한 당시의 시선은 지금과는 달랐던 것 같다. 학생 대부분과 시민들이 학생운동을 지지했었다. 걱정이 질책으로 표현됐을 뿐이지 우리를 비난하는 시선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사안을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도 많을뿐더러 20대들의 상황을 고려하면 사안에 무감하다고 비난할 순 없다.

딸 어머니 | 지금의 20대에게도 ‘사회운동’에 대한 거부감은 투영된다. 제 주변에는 당시에도 자녀가 ‘데모질’을 한다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빨갱이질을 한다’고 말했던 그 사람들을 무작정 욕할 수만은 없다. 그 시각 자체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전달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예전보다 많은 정보가 있는데도 그때 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주변에서 “네 딸, 돈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 하긴 요즘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겠니?”라는 질문이 아직도 나온다.

아들 | 4.18을 맞아 문선 활동하는 학생 중 그 의미를 아는 학우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 참여하는 학생 자체도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또 이에 대한 일반 학생들의 평가가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현실은 무관심하다. 그저 학생운동을 감상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다. 때문에 당장 행동하지 않더라도 문제 자체를 고민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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