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젊은 세대에서 ‘덕질’이란 표현은 팬 활동이나 깊이 있는 취미생활로 이해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오타쿠를 순화한 ‘덕후’란 표현이 등장하면서 특정 인물이나 취미에 깊게 빠진 사람을 통칭하고 있다. 취미의 사전적 의미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한 행위’이지만, 덕후 세계에서는 취미에 그치지 않고 전문가의 영역으로 나아간 사람을 성공한 덕후라 말한다. 취미가 직업이 되어버린 일명, ‘덕업일치’를 달성한 덕후 세 명을 만나 깊이 있는 취미생활이 그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들어봤다.

일하면서 놀고, 놀면서 일하고 (보드게임 덕후 김건희 씨)

▲ 사진 | 이지영 기자 easy@kunews.ac.kr

2003년 대학로의 한 보드게임방에 가기 위해 지하 계단을 내려갔던 기억을, 김건희(남·37) 씨는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든 순간이라 말했다. 그때 만난 ‘카탄의 개척자(카탄)’는 김건희 씨의 보드게임 덕질 인생을 개척했다. 게임 속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이 즐거웠던 그는 취미로 보드게임을 만들었다. 2012년 평범하게 회사에 다니다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보드게임 작가를 직업으로 삼았다. 취미가 직업이 된 후에도 김 씨는 보드게임이 한 번도 질린 적 없다고 단언했다.  

김건희 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보드게임 덕후의 기질을 보였다. 문방구에서 파는 1000원 짜리 ‘졸리게임’ 시리즈를 친구 세 명이서 매주 돌아가면서 샀다. 중고등학생 때는 입시 공부로 게임에 손도 대지 못하다가 군 제대 후 보드게임 카탄을 만났다. 카탄은 무인도에서 여러 부족이 각자의 영역을 넓히는 게임이다. “부루마불은 주사위를 던지면 숫자만큼 말이 움직이는데, 카탄은 주사위를 던지면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자원을 줘요. 어렸을 때 하던 게임과는 차원이 다름을 느꼈죠. 이후로 외국 보드게임을 사서 즐기기 시작했어요. 한 달에 수십만 원은 기본이었죠.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온통 투자했으니까요. 지금도 집에 보드게임이 천 개 정도 쌓여있어요.”

게임을 즐기기만 하던 김건희 씨가 직접 만들기 시작한 건 대학생 때 벤처학 수업에서부터다. 지원금을 받고 시제품 하나를 만드는 수업에서 처음으로 보드게임을 만들었다. 이후 출시가 목적이 아닌 순수한 취미생활로 게임을 제작했다. 2003년 보드게임 개발자모임(KBDA)을 만들어 그 안에서 사람들의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전문 제작업자가 된 지는 4년 차다. 김 씨는 취미가 직업이어서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게임은 보수가 없어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텐데, 이제는 돈도 받으니 일이 더욱 재밌죠. 취미가 직업이니까 취미생활을 회사 다닐 때보다 훨씬 많이 하고 있어요. 작가는 보드게임을 많이 하는 게 자기계발이거든요. 게임을 완성하기까지 수없이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지루함만 견디면 정말 만족하고 있어요.”

김건희 씨는 취미로 창업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권유할 것이라 말했다.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고자 창업한다면 실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대가를 받고 하는 방법을 고민하라고 덧붙였다. “하고 싶은 것을 해서 후회하지 않으니 저는 성공한 덕후죠. 직장생활이 적성에 맞는다면 취미와 직업을 병행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취미를 업으로 삼아보는 것도 삶의 한 방법이에요. 어떤 분야를 잘해야 먹고 사는데, 그러려면 그 일이 재미있어야죠. 덕후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오고 있다잖아요.”

보물 수집을 업으로 삼다 (팝업북 수집 덕후 배용태 씨)

▲ 사진 | 이지영 기자 easy@kunews.ac.kr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청년은 하루에 소설 한두 권씩은 꼭 읽었다. 소설 한 권에 4000원이던 시절 그는 한 달에 책값으로만 몇만 원을 쓰기도 했다. 좋아하는 책은 빌려보지 않고 사서 자신의 책장에 꽂아두길 좋아했다. 수집은 그의 본능이었다. 문학청년이었던 배용태(남·45) 씨는 시인이자, 책 수집가이자, 수집한 물품을 파는 가게를 11년 째 운영 중인 사장이다.

배용태 사장이 주로 수집하는 대상은 팝업북(pop-up book)으로 책을 펼쳤을 때 그림이 입체적으로 피어오르는 일종의 그림책이다. 1880년대부터 시작된 팝업북은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전성기를 거쳤다. 이 시기에 나온 빈티지 팝업북은 수백만 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배 씨는 빈티지 팝업북의 단순함과 낡은 종이의 바래진 색감에서 매력을 느꼈다. “언젠가 일본에 여행 갔다가 골동품 시장에서 로버트 사부다가 1960년대에 만든 신데렐라 팝업북을 발견했습니다. 누구의 작품이고, 팝업북이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도 모르고 샀죠. 한 번 매력에 빠지고 나니 책 모으기를 좋아했던 습관이 팝업북에서도 똑같이 나타났죠.” 

배용태 씨는 팝업북에 관해서라면 역사, 제작기법, 대표 작가 등 폭넓은 전문 지식을 갖추고 있다. 취미로든, 전문으로든 수집할 때 물건을 선별해서 사들이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배 씨는 팝업북에 대한 이론서, 역사책부터 10년 전 팝업북 전시회에서 샀던 도록까지 다양한 경로에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배 씨는 진정한 수집가란 마구잡이로 사들여서는 안 되고, 뛰어난 작품만 골라야 함을 강조했다. “저평가되는 물건도 사들여 양을 불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팝업북 대표 작가의 작품 중 예술적 가치가 높고, 상태도 좋은 책만 골라서 수집했을 때 다른 수집가와 질적인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가치 평가를 위해선 당연히 깊이 공부를 해야 해요. 2008년에 수집했던 1960년대 대표 작가 쿠바스타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갖고 싶은 마음이 커서 성급하게 책을 샀는데 상태가 정말 안 좋았거든요. 그때 다시 한 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좋은 상태의 작품을 사자는 철칙을 되새겼죠.”

배용태 씨는 희귀한 책을 자료로 수집하는 손님에게 맞는 물건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가게를 운영한다. 디자이너나 미술계 교수가 그런 부류의 단골손님들이다. 배 씨는 전문가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책을 눈여겨 뒀다가 수집하고, 제공해서 수입을 얻는다. 배 씨의 수집은 자기만족적이기도 하면서 타인의 수집욕을 채워주고 있다. 가끔 수입이 좋지 않아 수집하는 일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사들이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적자로 이어지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용태 씨는 ‘안 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기다린 물건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더 커서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재밌긴 하죠. 하지만 어느 정도 수입이 바탕이 돼야 하니까 마냥 쉬운 일은 아니네요. 그래도 남들처럼 싫어하는 일 안 하고, 스트레스 덜 받으면서 하고 있으니까요. 그저 귀한 보물을 구해서 나도, 손님도 기뻐한다면 수집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깊이에서 찾아오는 재미 (그래픽노블・히어로물 덕후 이규원 씨)

▲ 사진 | 본인제공

2016년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서로를 노려보는 <시빌 워> 포스터만으로 슈퍼히어로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시빌 워>의 흥미진진한 싸움 뒤에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 정부의 국민 감시라는 사회적 화두가 담겨있단 사실은 마니아들 사이에선 오래된 얘기다. 이규원(남·38) 씨는 덕후만 아는 깊은 지식을 활용해 그래픽 노블과 미국 슈퍼히어로물을 전문으로 번역하는 ‘성공한 덕후’다.  

현재 마블코믹스와 DC코믹스를 필두로 하는 미국만화가 한국 문화에 자연스럽게 정착했지만, 2000년대 초에는 번역된 작품이 한 달에 한두 권씩 소개되는 수준이었다. 공식적인 공급이 적은 만큼 인터넷 카페에서 자체 번역하는 사람들이 국내 미국만화 문화를 선도했다. 이규원 씨 역시 카페에서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불법으로 복제돼 유통됐던 ‘해적판’ 번역물을 챙겨 읽고, 감상 내용을 사람들과 공유했다. 이 씨가 번역까지 취미로 즐기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처음 번역한 작품은 <얼티메이트 어드벤처(Ultimate Adventure)>로, 마블 코믹스가 만화의 영화화를 목표로 만든 세계관 모음집이었다. “자체 번역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미안함이 문득 들어서 ‘나도 번역을 해볼까?’ 생각했어요. 대학 시절 번역에 대한 관심이 조금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죠. 2007년부터 친구들과 수업 끝나고 당구 치는 정도의 시간을 들여서 번역하고, 블로그와 카페에 올렸어요. 만화를 좋아하는 오타쿠였어요. 전문 번역가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죠.”

이규원 씨가 ‘덕업일치’를 이룬지는 5년 정도 됐다. 그의 블로그에 쌓인 번역과 분석글을 읽은 출판사가 2009년 전문 번역가로 일할 것을 제의했다. 취미가 업이 됐을 때 장점은 ‘깊이에서 찾아오는 재미’다. 미국만화의 시작은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시기로, 각 만화에는 당시의 정치, 사회, 문화적 이슈가 담겨있다. 미국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배경을 모르면 재미가 반감되고, 이해도 어렵다. 이 씨는 번역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미국역사에 대한 공부를 깊게 했다. “도움이 많이 됐던 건 ‘양덕(외국인 만화 마니아)’이 운영하는 블로그였죠. 자국 역사에 대한 설명은 물론 스토리에 대한 비평도 신랄하게 하거든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공부한 만큼 만화가 더 재밌어요. <시빌 워>의 배경인 2000년대 미국 정부의 모습은 2016년에 한국에서 일어난 대테러방지법 논란과 닮아있죠. 단순 취미였다면 이렇게 깊이 공부하진 않았겠죠. 취미가 직업이어서 생기는 단점은 번역할 거리가 쌓여 있으면 다른 만화를 못 보는 것 정도?”

이규원 씨는 국내 미국 만화 마니아층에선 성공한 덕후로 인정받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이어나가고 있고, 오역을 거의 하지 않는 번역가로 유명하다. 성공한 덕후란 칭찬에 이 씨는 웃었다. “그런데 제 일상은 평범해요. 번역가가 비정규직이어서 수입이 안정적이라고 하긴 어렵고. 다만 취향을 공유하는 아내가 있어 마음 편히 덕업일치의 삶을 살고 있죠. 덕후인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왕이면 취미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과 연애를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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