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엔 수많은 예술가들이 살아간다. 장애예술인도 예술가로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림 작가, 댄서, 성악가, 피아니스트로서 살아가는 장애예술인 4인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약사에서 작가로 나아가다

▲ 임현주 작가와 그의 작품 <아사셀 양>

임현주(여·57) 씨는  2005년 장애인 창작스튜디오에 우연히 갔다가 입주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로 2009년부터 ‘미완성’, ‘마음으로 그린 그림’, ‘외치다’ 등 본격적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게 좋았다. 3살 때 교통사고로 척수장애인이 된 임 작가는 약대를 졸업하고 약사가 됐지만, 삶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20대에 부모와 형제들이 모두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차린 약국도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경제적, 심리적인 부담을 느끼면서 임 씨는 다 포기해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깊은 절망에 빠져있던 어느 날 어릴 때 꿈이었던 화가가 생각났다. ‘세상을 끝내더라도 하고 싶은 것 실컷 해보고 죽자’란 생각에 한동안 놓았던 붓을 다시 잡았다.

가족을 잃은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나 막막했다. 하지만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임 씨는 남들이 보기에 그저 부러운 대상이었다. “장애가 있지만 약사도 하고 상담가도 하고 미술 강사도 하니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을 하더라고요. 사실 많이 힘들고 외로웠는데 말이죠.” 대화를 해도 공감은커녕 더 외롭기만 했다. 점점 남에게 입을 여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임현주 씨는 사람 대신 그림과 얘기를 시작했다.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못한 것과 이해받지 못한 감정들을 그림으로 외쳤다.

임현주 작가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사람들이 와서 작품을 보고 공감하고 치유 받는 모습을 보면 직업으로서 보람을 느낀다. 미술 강사로도 활동하는 그는 장애를 가진 멘티들이 각자 자기의 재능을 잘 찾아낼 때 기쁨을 느낀다. “50여 년을 밖에 나가보지 않은 뇌성마비를 지닌 멘티가 자신에게 맞는 기법들을 익혀 전시도 하고 자신감을 얻으면서 사회활동도 넓혀가는 걸 보고 가장 기뻤어요.”

 

한국 최초 휠체어 댄서, 아시아로 뻗어나가다

국내 1호 휠체어 댄스 챔피언이자 아시아 대회 4회 연속 우승자인 김용우(남‧45) 휠체어 댄서는 학부시절에 경영학을 전공해 무역업에 종사하며 세계를 주름잡는 경제인이 되고 싶었다. 평탄하기만 했던 그의 삶은 1997년 10월 완전히 뒤바뀌었다.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갔다가 차가 전복되는 사고로 그는 척수에 손상을 입으면서 하반신이 마비된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 장애 판정을 받은 그는 인정하기 힘든 현실과 마주하면서 좌절을 겪었다. 장애라는 그늘에서 벗어나는데 3년의 방황을 겪은 그는 아는 형으로부터 휠체어댄스를 권유받았다. 2002년 당시엔 국내에 휠체어 댄스란 종목이 알려지지 않았고,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처음엔 작은 위안을 삼아 춤을 배우자는 생각이었다. 춤을 추면서 자신감을 되찾고 즐거움을 느낀 그는 한국휠체어 댄스스포츠연맹 이치훈 회장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휠체어 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도 섬세하고 빠른 동작이 요구되는 휠체어 댄스가 쉽지만은 않았다. 무거운 휠체어를 이용해야하기에 춤을 한번 추면 온몸이 쑤시기도 했다. 당시 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많았고 ‘직업으로 꾸준히 할 수 있을까’란 회의감에 포기할까 생각도 했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나간 대회에서 기적적으로 우승을 한 그는 다시금 댄서로의 길을 걷는다. 노력의 결과로 현재 그는 아시아 최강 댄서로 인정받고 있으며, 2015년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상 대상을 수상했다.

장애인과 장애인,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즐거운 음악에 맞춰 동등한 위치에서 춤을 추며 하나가 되는 게 좋다는 김용우 댄서는 휠체어 댄스의 대중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는 스포츠 댄서를 은퇴하고 현대무용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두 개의 휠체어 바퀴를 본인의 두 다리처럼 여긴다는 그는 춤을 출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다. 바닥에서 보다 더 다양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도록, 김용우 댄서는 매일 휠체어 안무를 연구하고 연습한다.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전문성을 갖추려 노력한다면 각자의 자리에서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그다.

 

향기 나는 목소리로 성악을 부르다

▲ 성악가 이남현 씨가 대학로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기적을 노래하는 바퀴달린 성악가 이남현(남·35) 씨는 후천적 척수장애인이다. 성악을 전공한 그는 제대한 뒤 복학을 앞둔 2004년 여름 수영장 벽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목뼈가 부러져 목 신경이 끊어졌다. 절망에 끝에 다다른 그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가 성악가란 꿈을 다시 꾸게 된 건 우연히 소아병동 앞을 지나다 동요에 맞춰 율동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게 된 뒤부터였다. 음악을 듣는 순간만큼은 아픔을 잊고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느낀 이남현 씨는 노래를 다시하기로 결심했다. 형편없는 폐활량과 척수신경 손상으로 인한 복식호흡 불가. 의사도, 주변인들도 가능성이 1%도 안 된다며 극구 말렸다. 그는 ‘전례가 없다.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적으로 여기고 살라’는 말에 더욱 하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스스로가 모범사례가 된다면 비슷한 장애를 가진 다른 이들도 용기를 갖고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고민 끝에 학교에 복학한 그는 1년간 ‘도레미파솔라시도’만 연습하며 음정을 잡는데 집중했 다. 늘지 않는 실력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청산에 살리라’를 완창할 수 있었다.

그는 ‘장애인이 얼마나 하겠어’하며 비장애인보다 부족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눈빛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럴수록 그는 ‘장애를 갖고 있음에도 이렇게 노래를 할 수 있구나’를 느끼도록 노래를 더욱 더 열심히 연습했다.

이남현 씨는 지금은 여러 무대에서 토크쇼와 공연을 갖고 텔레비전과 및 라디오 출연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장애인 예술가에 대한 인식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까지 편견을 갖고 있는 관객들을 위해 그는 더욱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장애인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

건강하기만 했던 신은애(여·34) 씨는 초등학교 입학식 날 자고 일어났지만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이면 떠지겠지’ 생각했지만 그날부터 그는 시각장애인이 됐다. 암담했지만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피아노로 세상과 소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피아니스트란 꿈을 품은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피아노를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장애인이란 이유로 중학교 시절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곤 했지만 그럴수록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인 피아노에 더욱 열중했다. 그런 모습에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어느새 ‘안 보이지만 피아노 연주에 있어서는 열정 가득한 연주자’가 돼 있었다.     

대학교에서 피아노과를 졸업한 신은애 씨는 대학 졸업 전까지 자신이 그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일 뿐 시각장애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수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었고 시각장애인이란 말을 딱히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졸업 후 취업준비를 시작하면서 병원에서 장애판정을 받았고 피아니스트가 아닌 사회복지사로 직업을 전향했었다. 가족의 품을 벗어난 사회는 쉽지 않았다. 장애인으로서 피아니스트가 되기란 어렵고도 어려웠다. 장애인예술가로서 꾸준한 직업을 갖고 일하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에서 2년 동안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그는 장애를 가진 친구들도 전문적인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악보를 보지 못하는 그는 비장애인들보다 3배 이상 연습했고 노력했다. 201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한국대표로 초청을 받아 국제장애인피아니스트에 출전한 그는 ‘나도 충분히 할 수 있구나’ 자신감을 얻고 지금까지 피아니스트로 활동해오고 있다. 

그는 장애인인 것이 걸림돌이라기 보단 자신의 오롯한 이미지로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기에 곡을 듣고 치는데 있어 자신만의 이야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더 잘 담아낼 수 있다고 믿는 신은애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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