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의 잘못으로 인해 지구가 점점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한 여름인양 ‘훅’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느끼는 요즘이다. 6월 중순에 이르면 더욱 뜨거워질 태양과 함께 한국사회를 달궈 줄 이슈가 다가올 것이다. 퀴어 축제. 사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전사회적으로는 크게 주목되지 않았던 이 행사를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릴 수 있을 만큼 널리 널리 알려주신 분들은, 역설적이게도 주류 개신교 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5월 23일, 일부 기독교단체의 주도로 '퀴어축제'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사진|김태언 기자 bigword@kunews.ac.kr

‘음란 마귀들의 광란을 막아야 한다!’는 한국 개신교 다수의 움직임은 지난 수년 동안 분명하고 구체적인 활동을 이어갔는데, 재작년 신촌에서는 퍼레이드를 막아선 채 통성기도회를 이어갔고, 지난해에는 시청 앞 광장을 둘러싸고는 저 유명한 부채춤(니퍼트 미 대사를 위해서도 추었었지요!)과 발레를 선보이기도 했었다. 이와 같은 개신교의 성소수자 혐오행동은 비단 퀴어 축제에 대한 반대 뿐 만 아니라, 2007년부터 지금까지 차별금지법 제정을 막아서고(그럼 대놓고 차별하겠다는 것인가?), 소위 ‘전환치료’라는 명목으로 감금, 폭언과 폭행 등의 불법행위를 신의 이름으로 자행하며, 대학 내 성소수자 관련 동아리에 대해 기물파손 등의 직접적 위해를 가하는 등, 무척 ‘버라이어티’하다. 최근에는 유력 교단 신학기관에서 ‘동성애, 에이즈 예방 콘서트’라는 이름의 행사가 개최되기도 했으며, 이를 계기로 ‘학내 동성애자를 색출하여 징계하라’는 결정이 재단이사회를 통해 학교에 전달되기도 했다. 한국 개신교 주류에 있어 성소수자는 곧 ‘죄인’인 것이다.

 

한국의 다수 개신교 단위에서 성소수자에 대해 이처럼 부정적인 것에는 ‘성서관’과 ‘내적위기’ 등의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다. 먼저, 성서관에 있어 한국개신교 일반은 ‘축자영감’ 즉 한 글자 한 글자 성령의 감동을 통해 작성된 것‘이라는 입장에서 ‘문자적 이해’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로 인해 성서는 궁금함과 질문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믿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이와 같은 성서관은 대다수가 극도로 보수적이고, 백인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계통 선교사들로부터 학습된 것인데, 이들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인해 한국의 개신교는 안타깝게도 성서에 대한 문자적 이해와 함께 이웃문화와 종교에 대한 공격성을 함께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성서에 대한 접근과 이해에는 다양한 방법과 입장이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것을 떠나 최소 이천 여 년 전에, 그것도 저 멀리 팔레스타인과 남부유럽 등지에서 다른 문자로 기술되었던 성서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도 유의미한 글이 되려면, 기술했던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와 본문에 대한 해석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앙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성서에 대한 경건함이야 신앙인의 입장에서 충분히 가져야 하는 것이지만, 이 때문에 일체의 학문적 접근이나, 해석을 금해야 한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천국에 갈 때 ‘머리는 떼어둔 채 가슴만 들어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성소수자에 대해 성서는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을까? 사실 성소수자라는 근대적 표현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남색 하는 자’ 등의 표현이 적혀있으며, 예외 없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성서에서 ‘비늘 없는 물고기’를 금기하고 있다하여, 개신교인들이 오징어를 먹지 않는 것은 아니듯, ‘남색’을 금지했다하여 그 문구를 그대로 지금 세상에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생물학적 남성간의 성행위인 남색이라는 단어가 성소수자 전체의 사랑 전체를 담는 것도 아닐 것임은 부가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또 교회의 성소수자 반대의 근거로 흔히 인용되는 소돔사건(성에 찾아온 신의 대리자들을 소돔 남성들이 나와 폭행하려드는 내용)은 동성 간의 성행위 금지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소수에 대한 압도적 다수가 휘두른 폭력이 더욱 중요한 주제이겠다. 그러니 이 본문을 가지고 동성애 반대 운운하는 것은 주제에서 벗어난 해석, 다시 말해 전제된 혐오를 뒷받침하기 위해 지극히 자의적으로 성서를 인용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동성애 혐오의 이유 중 두 번째는 개신교의 내적위기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상황 속에서 급성장했던 개신교 교세는 1990년대를 넘어가면서 정체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십여 년 전부터는 뚜렷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자본축적과 종교적 가치를 혼동하고, 이를 위해 사회의 기득권과 결탁하는 가운데 각종의 비리에 연루되는 등 그간 한국 개신교가 보여주었던 추태에 대한 비판과 불신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건강한 개인과 조직에게 있어 위기는 한편,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과 반성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그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외부에 ‘적’이나 ‘왕따’를 만들고는 그에 대한 대항이나 놀림을 매개로 단결을 모도하게 된다. 불행히도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한국개신교는 이 중 정확히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으며, 그 개신교가 선정한 적 혹은 왕따가 성소수자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개신교인 감소와 한국교회의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이 시작된 시기의 유사성을 생각해 보면 더욱 신빙성이 느껴질 것이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 일반은 혐오를 통해 자신의 과오를 잊으려 발버둥치고 있다.


 
현재 한국 개신교의 주류세력들은 매우 강력하게 혐오를 신앙고백하고 있다. 올해 6월에도 무언가 보여주겠다고 벼르고들 계실 것이다. 혐오가 자기 정당성을 획득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고 마는가에 대해 우리는 얼마 전 강남역 부근 건물 화장실에서 발생했던 여성혐오범죄를 통해 똑똑하게 확인하지 않았는가? 흔히 개신교가 속한 기독교 전체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한다.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는 종교에게 있어 그 어떠한 혐오도 결코 신앙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동성애 혹은 다양한 성의 사랑은 이성애자들의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설령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더라도 그 ‘다름’이 혐오의 이유일수는 없지 않겠는가? 성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 사회의 권력들로부터 온갖 혐오의 단어로 비난받던 이들, 세리, 성매매여성, 어린이, 피부질환자, 시각장애인, 여성, 외국인들의 친구, 아니 곧 그들 자신으로 사셨다. 그리고 성서는 부활한 그 이가 주류세력들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 땅 갈릴리에서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선언을 전한다. 지금이라도 한국교회는 혐오를 신앙 고백하던 잘못을 뉘우치고, 작은 존재들의 곁으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고상균 한국기독교장로회 향린교회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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