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벤저스2>의 한 장면이다. 분노한 헐크와 아이언맨 헐크버스터가 도심 한복판에서 건물과 차량을 때려 부수며 전투를 벌이는 상황. 토니 스타크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막기 위해 헐크를 피해 비행하던 중 빈 건물 하나를 발견한다. 건물을 바라보자 슈트 속 화면에는 건물주, 가격 등의 정보가 표시된다. 토니는 그 자리에서 건물을 사들이고 빈 건물로 장소를 옮겨 헐크와의 난투를 이어간다.
 
영화 속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 기술이 대중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스마트폰으로 도로를 비추면 건물명과 전화번호가 표시되고, 외국어 문장을 비추면 원하는 언어로 즉시 번역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 사진 | 이명오 기자 myeong5@  일러스트 | 주재민 전문기자
현실에 정보를 더하다 ‘증강현실’
AR은 전자 안경이나 스마트폰과 같은 디바이스를 통해 실제 세계에 3차원 가상물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을 뜻한다. AR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과 차이가 있다. VR은 사용자에게 100% 허구의 콘텐츠를 제공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그래픽 게임이 VR의 초기형태라 할 수 있다. 반면, AR은 실존하는 리얼리티에 그래픽을 덧입힌다. 현실을 기반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특성으로 인해 AR은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스웨덴 가구 제조사 IKEA에서는 2013년도에 가상의 가구를 직접 배치해 볼 수 있는 앱 ‘퍼스트 룩’을 출시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원하는 장소를 비추면, 앱에 내재된 3D 모형 가구들이 가상으로 배치되는 형식이다. AR은 군수 분야 등에서도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서기만 LG수석연구위원은 “AR은 예전부터 전투기 조종사들이 쓰고 있는 헬멧이나 자동차의 앞 유리창에 교통 정보를 표시하는 형식으로 이용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AR 적용 앱은 2010년도 초반부터 개발됐고 일부 산업 분야에서는 이미 적용됐지만, 이제야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잠잠하던 AR 산업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는 기술이 아닌 콘텐츠
도심 한복판에서 포켓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각국의 게이머들은 포켓몬을 잡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나이언틱 개발사와 닌텐도가 힘을 합쳐 만든 AR 적용 게임 ‘포켓몬GO’ 때문이다. 국내에는 아직 정식으로 서비스되지 않았지만, 서비스 오류로 강원도 속초시와 울산 인근 지역에서만 플레이가 가능했다. 게이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빨리 속초행 티켓을 끊었고,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속초는 예년 여름보다 일찍 호황을 맞았다. 이러한 포켓몬GO 열풍에 대해 이락 디지털문화연구소 이장주 소장은 “유년기 시절 추억을 공유했던 친숙함과 AR이라는 기술의 새로움이 만나 30대 안팎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포켓몬GO의 성공을 보며 전문가들은 ‘콘텐츠의 승리’라고 입을 모았다. 1996년에 처음 만들어져 20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아 온 포켓몬스터는 관련 콘텐츠로만 50조 원 넘게 벌어들인 일본의 거대한 콘텐츠 자산이다. 또한, 포켓몬GO를 만든 구글의 사내 벤처기업 나이언틱은 지오캐싱(Geocaching: GPS를 활용한 보물찾기 놀이) 시스템 기반의 AR 게임 ‘인그레스’를 대중화한 경험이 있었다. 포켓몬GO는 포켓몬스터라는 거대 콘텐츠와 나이언틱의 기술력이 더해져 탄생한 ‘잘 만들어진’ 게임인 것이다.
 
소프트웨어 정책연구소 양병석 연구원은 “여행을 하며 몬스터를 하나둘씩 수집해나가는 포켓몬스터의 스토리는 AR로 구현하기에 아주 적합한 콘텐츠”라며 “포켓몬GO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라 20년 이상 스토리가 축적된 포켓몬스터라는 지적 재산과 구글의 기술력, 게임 플랫폼을 운영하는 나이언틱의 노하우가 녹아들어 간 것”이라고 말했다.
 
지적 재산을 향한 안이한 태도가 ‘콘텐츠 빈곤’ 낳아
우리나라에도 포켓몬GO를 만드는 AR 기술은 있다. 하지만 스토리를 풀어나갈 적합한 콘텐츠가 없다. 관련 전문가들은 ‘무형 콘텐츠를 대하는 인식의 차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포켓몬스터와 같은 거대 콘텐츠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양병석 정책연구원은 게임을 예로 들며 콘텐츠에 대한 한일 간의 인식 차이를 설명했다. “일본에선 무형 콘텐츠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며 즐기는 문화를 기반으로 탄탄한 스토리가 중요한 비디오 게임이 성장할 수 있었고, 이는 곧 지적 재산을 중시하는 산업 방향의 토대가 됐지만, 우리나라는 무형의 콘텐츠를 불법 복제해도 괜찮다고 생각해 콘텐츠가 클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불법 복제를 쉽게 생각하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좋은 콘텐츠는 생산되지 않을 것이고, 콘텐츠 빈곤의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란 입장이다.
 
문화 산업을 폐쇄적으로 대하는 정부의 정책도 더딘 콘텐츠 성장의 원인이 됐다. 이재홍 한국게임학회장은 “일본의 경우 자국의 전통문화를 보존하면서도, 서구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자율규제정책을 펼쳐 오늘날의 문화강국이 됐지만, 우리나라는 만화가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며 만화 더미에 불을 지르고, 온라인 게임에 셧다운제를 도입하는 등 폐쇄적인 규제로 일관했다”고 말하며 문화 콘텐츠를 대하는 정부의 소극성을 지적했다.
 
스토리 기반으로 콘텐츠 발전시켜야
전례가 없을 만큼 성공을 거두고 있는 포켓몬GO는 AR 서비스 상용화의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포켓몬GO를 선두로 국내 게임 회사들 또한 AR 게임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AR기업 소셜네트워크(대표=박수왕)는 지난 18일 뽀로로를 만든 아이코닉스사(대표=최종일)와 함께 한국형 포켓몬GO인 ‘뽀로로GO’를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반응은 다소 냉담하다. 김정현(정보대 컴퓨터학과) 교수는 “포켓몬을 잡고 진화시키는 내용의 포켓몬스터는 GPS 위성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지오캐싱 게임에 적합하지만, 뽀로로를 어떻게 지오캐싱 시스템에 매칭 시킬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우리나라의 문화 콘텐츠가 성장하기 위해선 ‘스토리’를 중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재홍 학회장은 “서사적 완성도가 높아 서정성과 역동성이 풍부한 <월드오브워크래프트>와 서사적 완성도가 낮아 역동성만 풍부한 <리니지>는 서로 좋은 대조를 보인다”며 “완성도 높은 스토리텔링은 글로벌 파워 콘텐츠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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