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기대와 논란 속에 탄생한 ‘참여정부’가 출범한 지 벌써 8개월이 흘렀다. 1960년대부터의 암담한 군사정권 시절이 1990년대 초에 끝나고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이 모든 과정은 대개 한국에서의 민주화 과정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다른 편으로 이것은 정치적, 절차적 민주화에 불과하지 사회경제적, 실질적 민주화는 아직 요원하다는 반론을 받는다. 그 구체적 증거가 노동 현실 속에 무수하다.

예컨대 ‘노동운동의 귀족화’를 비판하며 ‘옳든 그르든 법대로’ 처리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현실 인식 문제도 문제이거니와 악화되는 고용 사정과 비정규직, 청년 실업과 여성 노동, 단합과 노조 기피, 활동가 탄압 등과 같은 구체적 현안들이 늘 문제다.

사실 참여 정부 초기에는 배달호씨의 분신으로 고양된 두산중공업 사태가 정부의 전향적 조정으로 비교적 원만히 마무리되고 4월의 철도투쟁에서 그나마 합의가 이루어졌기에 노동계에서는 ‘개혁과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경제계와 만남의 장을 반복해서 갖게 되면서 노동 개혁에 대한 태도가 하나씩 바뀌고, 급기야 6월의 철도노조 파업과 화물연대 파업에 직면해서는 “일부 노동운동이 도덕성과 책임성을 잃고 있다”며 “법과 원칙에 따라 단호하게 대처”한다고 경고했다.

6월 말 철도노조 파업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은 노동계로 하여금 참여정부에 대한 기대를 내던져버리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게다가 8월 말 들어 대통령이 “민주노총의 활동은 정당성이 없다”고 직접 공격하였고, 반면에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 회장이 “대통령을 각종 모임에서 10번 정도 만났는데 일관되게 글로벌 시대에 맞는 노사관계를 만들테니 2년의 시간을 달라 했다”며 정부를 신뢰할 정도가 되었다.

특히 새 정부 들어 구호로 등장한 ‘2만 달러 시대론’과 노사관계의 새로운 로드맵을 만들겠다며 9월에 발표된 ‘개혁안’은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동일한 패러다임 위에 있다. 그것은 우선, ‘성장 뒤 분배’라는 구시대적 논리와 다름없고 따라서 ‘해이해진’ 노동자들의 ‘군기’를 다시 잡아야 한다는 기본 입장이 깔려 있다. 나아가 새로운 로드맵으로 제시된 ‘개혁안’은 근본적으로 글로벌 시대의 자유로운 자본 활동에 걸맞는 새 조건들을 만들면서 겨우 국제적 비난을 모면할 정도의 개선만을 담아내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2만 달러 시대론’은 마치 예전의 ‘60년대엔 대망의 70년대를 내다보며 허리띠를 졸라매라 했고 70년대엔 대망의 80년대를 내다보며 땀을 흘리자고 강조했던 시대’를 연상케 한다. 물론 80년대엔 대망의 90년대를 보며 열심히 일하자고 했지만 결국엔 97년에 IMF 사태와 더불어 ‘대망’하고 말았다. 그 뒤 새로 나온 메뉴가 ‘국민의 정부’의 ‘대망의 21세기론’이었고 이제 ‘참여 정부’ 들어 ‘2만 달러 시대론’이 나온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파이 크기 타령론’이 가진 근본 결함을 별로 반성하지 않은 결과이며 그야말로 21세기 이후의 미래를 걱정하는 근본 철학이 빠진 결과이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비록 콩 한 알이라도 나눠먹자’는 공생의 자세이며 나아가 ‘파이 하나를 만들더라도 노동과 자연의 희생을 동반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자’는 성찰의 자세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노사관계 로드맵인 ‘선진화 개혁안’은 기본적으로 노사관계의 민주화를 가속화함으로써 경제사회 민주화, 나아가 실질적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차원보다는 치열한 세계시장의 경쟁에 대한 노사관계의 적응을 기조로 한다는 점에서 노사관계를 ‘도구화’하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세계시장의 경쟁이니 생산성 높은 고효율의 노동이니 하는 것들도 모두 우리가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이야기들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구호들이 얼마나 인간다운 삶과 행복의 증진에 이바지해 왔는가 라는 잣대로 보면 결국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 인간화가 아니라 비인간화를 더 많이 초래했고, 일하는 사람보다는 자본의 이익, 풀뿌리보다는 기득권 집단을 위해 봉사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 시점에서 전형적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국제 경쟁에서 뒤지면 모든 것이 망하는데 그 다음엔 행복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하는 것이다. 맞다. 그러나 과연 국제 경쟁에 치열하게 동참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가? 지난 수십 년간 한국사회는 물론 국제 경쟁에서 일등한 나라를 보라. 미국은 과연 행복한가. 아니, 미국의 풀뿌리들은 과연 행복한가? 결론은 ‘노우’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접어든 지금 미국도 복지 예산 축소와 더불어 노동자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 거세다.  일례로 미국에서 공식 빈곤선(3인 가족의 경우 연소득 15,300불-약 1800만원-이 기준)으로 인정된 수준 이하로 사는 이들이 전체 2억 8천만 중 무려 12.5%에 이르는 3천 5백만 명에 이른다. 게다가 4천1백만 명은 의료 보험이 없는 상태이고 또 다른 4천만 정도는 빈약한 의보 혜택만 받는다. 미국 노동자들도 해마다 5천명 이상이 산재로 죽고, 매년 6백만 명이 산재 사고를 당한다.

신경제의 물거품 이후에 증가한 실업은 공식 통계만으로도 약 9백만 명을 기록하고 있다. 또 사회복지 공격의 일환으로 2002년과 2003년에 걸쳐 주정부들은 모두 750억불을 줄일 계획이다. 예컨대 위스콘신주에서는 32억불에 이르는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향후 8년간 6만6천여 공공부문 노동자들 중 무려 1만 명을 해고하려 한다.

나는 여기서 한국 노사관계의 전망을 말하면서 굳이 정부나 자본의 태도 변화를 논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 삶의 문제기 때문이다. 노사관계는 결국 당사자간 힘 관계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이 미래에 대해 어떤 구상과 전략을 가지고 대응하는가 하는 내용적 측면이다. 더 이상 ‘선진국 따라잡기’ 식의 망상이 아니라 진정한 공생의 패러다임을 ‘우리부터’ 먼저 모색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만 모든 풀뿌리들이 희망을 갖고 적극 ‘참여’할 것이다.

강수돌(경상대 경영학과 교수· 노사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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