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 여러 권의 책이 국내에 번역, 소개된 일본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는 전방위적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왕성한 집필 활동을 전개해왔다. 그는 특히 뇌과학, 원숭이과학, 생명공학, 우주개발 등 과학기술 분야에서 전문가 못지 않은 식견을 과시한다. 그런 그는 도쿄대 불문과 및 철학과 출신이다.

 불문과와 철학과라면 뇌과학이니 생명공학이니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보인다. 물론 대학의 학부 전공이 한 사람의 일생을 두고두고 좌우하는 건 아니지만, 다치바나의 지적 스케일이 범상치 않은 건 틀림없다. 그는<21세기 知의 도전>(청어람미디어)에서 20세기 분자 생물학의 성과를 정리하고 21세기의 새로운 바이오테크놀로지를 전망한다.

그는 21세기를 이끌어갈 과학 부문으로 컴퓨터산업과 바이오테크놀러지 산업을 든다. 또한 이 두 부문이 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되면 문자 그대로 미증유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하리라 전망한다. 그러나 첨단 기술이 발전할 수록 인류가 고민해야 할 윤리적, 철학적인 문제들도 깊어지리라는 게 그의 예상이다.

때문에 그는 최첨단 과학기술에 관해 기본적인 식견을 갖추는 건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사람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한다. 예컨대 사회 문제라고 하면 과학기술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유전자 조작, 생명 복제, 환경 오염, 온라인 프라이버시 문제 등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가 뒤섞여 있는 경우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좀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다치바나의 이러한 논지는 거의 반세기 전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작가 찰스 퍼시 스노우가 다소 다른 맥락에서 전개한 바 있다. 그가 캠브리지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 바탕을 둔 <두 문화>(사이언스북스)는 과학 문화와 인문 문화의 단절과 대립 양상에 대한 깊은 우려를 담고 있다.

 과학 문화와 인문 문화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스노우에 따르면 교육에 있다. 현대의 교육은 점점 더 전문화되면서 세부적인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기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한 가지만이라도 확실하게 잘 하면 먹고살 수 있다’고도 하지만, 과연 전문화가 능사일까? 스노우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협소한 전문성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의사소통하기가 곤란해진다. 각자 자기 분야의 이야기만 할 뿐, 각자의 분야가 전체 사회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고, 어떻게 다른 분야와 연결될 수 있으며 협력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어진다. 의사소통이 어려우니 상호 이해가 어려워지고 불신과 적대감마저 생겨나기 쉽다. 이쯤 되면 사회통합이 힘들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다.

 “한쪽 극에는 문학적 지식인이 그리고 다른 한쪽 극에는 과학자, 특히 그 대표적 인물로 물리학자가 있다. 그리고 이 양자는 몰이해, 때로는(특히 젊은이들 사이에는) 적의와 혐오로 틈이 갈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도무지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서로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스노우가 반세기 전에 한 위의 말이 낯설지 않게 다가오지 않는다. 왜일까? 바로 여기 지금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현실이기 때문은 아닐까? 과학기술을 알려하지 않는 인문 지식인, 문학과 역사를 알려하지 않는 과학인이 우리들 각자의 자화상은 아닐까?

표정훈(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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