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심동일 기자 shen@

“1995년에 학생들을 데리고 미국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캠퍼스에 어학연수를 갔었어요. 우리 학생들이 캘리포니아대 학생들에게 먼저 토론과 농구 시합을 제안하는 거 있죠. 그때 우리 학생들의 리더십이 뛰어난 걸 알았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학생들에게 일찍이 넓은 세상을 경험토록 하면 학생들은 재목이 될 것이라고.”

  1984년부터 본교 교직원으로 근무하다 8월 31일 정년퇴직한 조금생(남·61) 씨는 교직원 생활의 절반 이상을 국제교류에 힘썼다. 훌륭한 학생들에게 세상이 넓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 교직원 생활 내내 가진 그의 신념이었다. 1997년 국제교류실로 자리를 옮긴 조금생 씨는 그해 5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국제교육자협회(Association of International Educators)에 참가해 연세대와 공동으로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 학교 인지도가 높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 학교가 괜찮은 대학이라는 걸 보여주는 국제교류 협정서 초안을 만들어갔죠. 그러곤 미국, 호주, 일본 등의 해외 대학에서 온 국제교류 담당자들에게 협정서를 보여줬어요. 그때부터 국제교류가 차근차근 시작된 거죠.”

  조금생 전 본부장은 해외 대학과의 국제교류를 활성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조 씨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한국국제교육자협회(Korean Association of International Educators)의 회장직을 맡았다. 한국국제교육자협회는 국제교류 활성화를 위해 본교, 연세대, 경희대 등 국내 대학의 국제교류 업무담당자들 간 업무 협조와 정보 교환을 위해 결성됐다. 2000년에는 대부분의 국내 국제교류 담당자들에게 낯선 유럽국제교육협회(European Association for International Education)에 참가해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언젠가 퇴근길 버스에서 우리 학교 서문과 학생이랑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 학생이 묻더라고요. 왜 서문과 학생들은 교환학생으로 갈 기회가 별로 없는지. 마음이 너무 안 좋았죠. 그때와 비하면 요즘은 유럽의 해외 대학과도 교류를 많이 하고 있어요.”

  조금생 전 본부장은 교직원들의 다양한 시도가 ‘고려대’를 지속시킨다고 봤다. 많은 대학들이 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에서 ‘고려대’가 존속하기 위해 구성원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조 씨는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자유롭게 변화를 시도하도록 교직원이 다양한 노력을 통해 불편 없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직원이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서는 업무 결과를 인정하는 방식이 제도적으로 갖춰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하는 일을 인정받으면 정말 기뻐요. 저절로 신이 나서 새로운 일을 찾게 되죠. 주어진 일들만 해도 조직에 누가 되진 않지만 찾아보면 할 일은 엄청 많거든요.”

  조금생 전 본부장은 퇴직 후 봉사 활동을 할 계획이라 밝혔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직장생활, 그는 이제 주위를 둘러보고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궂은 일을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조 전 본부장은 “밥값을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전했다. 33년 간 그에겐 ‘고려대’가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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