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숙(충남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색채를 통한 도시이미지가 도시경쟁력을 만든다"고 말했다. 사진 | 김주성 기자 peter@

누구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색이 있다. 오빠와 집 앞 탁 트인 도로 옆으로 자전거 타던 기억은 어딘가 후련한 아스팔트 빛이었다. 놀 거리를 찾아 할머니 댁 골목을 헤매고 다닌 꼬마의 기억은 빨간 벽돌색이다. 우리가 살았던 동네의 색은 우리 기억 속에 스며들어있다. 빛이 있는 곳엔 모두 색이 있듯 도시에도 색이 있다. 도시색채는 오랫동안 그 터전에 살아온 사람들이 쌓아온 고유한 색깔이다. 도시색채학에서는 기존의 도시색채에 대해 연구하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어떻게 이어나갈지 고민한다.

▲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아르헨티나 라 보까에 정착했다. 이들은 항구의 노동자로 일하면서 일터에서 남은 페인트를 가져다 자신들이 사는 곳을 칠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만들어낸 감각적인 색채가 이어져 지금의 라 보까가 됐다. 사진 제공 | 이진숙 교수
▲ 프랑스 파리 도시 전체가 마치 하나인 듯. 회색 빛 하늘 아래 하나같이 무채색 지붕을 쓴 건물들이 있다. 가게 외벽은 모두 상아색, 테라스 난간도 모두 검은색이다. 건물들 사이로 들어가면 비슷한 풍경들이 이어진 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민들 저마다의 삶이 보인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모호한 곳. 이곳은 프랑스 파리다. 사진 제공 | 이진숙 교수
▲ 검은 모자, 붉은색 상의, 검은색 하의로 된 제복을 입은 영국 근위대가 악기연주를 하고 있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구경하고 있다. 빛바랜 노랑의 시계탑, 무채색 건물 외벽들 사이에 빨간 공중전화부스가 놓여있다. 빨간 이층 버스, 검은 택시가 도로 위를 달린다. 그렇게 영국의 상징 근위대의 빨강 검정은 런던 도시전체로 옮겨왔다. 사진 제공 | 이진숙 교수

이진숙 (충남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색채로 만들어진 도시이미지가 도시경쟁력을 만든다”고 말한다. 이진숙 교수는 도시색채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를 하며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도시경관사업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 색채학은 어떤 학문인가
“색채학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색이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할 것 같다. 색은 빛이 물체에 닿아 부서져 우리 눈에 인식되면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우리 주변 모든 것은 색으로 뒤덮여 있다. 정보의 80퍼센트가 시각을 통해 얻어지고 그 중 80퍼센트가 색으로 얻어진다. 사람은 많은 정보를 색을 통해 얻는다.

색채학은 색채현상의 본질을 밝히고 색과 인간과 관련된 모든 요소와의 상호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색채학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 신경계통에서의 광학활동을 규명하는 생리적 측면과, 개인마다 다른 경험과 학습에 의한 주관적 색채반응에 대해 연구하는 심리적 측면이 있다. 색의 국가별 상징성, 색과 권력 등을 연구하는 사회적 측면도 있다. 전통, 종교, 문화적 배경에 따라 색에 대한 해석과 기능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노란색의 의미는 동양과 서양에서 정반대다. 동양에서 노란색은 우주 만물의 중심을 상징한다. 중국 황제의 옷도 노란색이었다. 하지만 서양에서 노란색은 배반의 색으로 받아들여진다. 예수를 팔아넘긴 가롯 유다의 옷이 항상 노란색으로 그려지곤 했다”

- 도시 색채학은 어떤 학문인가
“도시에도 색이 있다.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그 지역의 토양색, 나무색, 생산되는 재료색, 심지어는 하늘색과 물색에 의해 지역색이 형성된다. 여기에 종교나 문화적 요소가 더해져 도시색채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과거에는 지역색과 문화적 요소에 의해 도시색채가 결정됐다. 하지만 근세에 이르러서는 정부와 지자체를 중심으로 도시 색채가 설계되고 유도된다. 이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 도시색채학이다.”

- 도시색채학은 어떤 식으로 연구가 진행되나
“최근에는 도시색채학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보다는 실제로 적용하는 방법 쪽에 비중을 둔다. 색채 설계를 할 때, 먼저 토지색, 나무색, 하늘색 등을 파악하는 자연환경조사와 시민의식과 문화 등을 파악하는 인문환경조사를 통해 그 지역에 축적돼 온 도시색채를 파악한다. 그 다음 기존의 도시색채와 조화를 이루면서 과거 색채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론을 만든다. 경우에 따라 당대의 유행이나 시대상을 반영해 방법론에 변형을 주기도 한다. 특히 아파트처럼 선호도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곳은 더욱 그렇다.”

- 도시를 디자인한다고 보면 되나
“도시색채는 디자인이 아니다. 정비라고 보는 게 더 맞다. 마음대로 색을 배치하는 게 아니라 주변 환경과 다른 건축요소들과의 조화를 고려해야 한다. 파리 외곽 신도시 라 데팡스(la defense) 중심거리는 파리 구도심의 특징인 사암 벽재와 회색 지붕의 색채 이어지도록 배색됐다. 유럽 해안가에서는 탁 트인 파란 바다의 색채를 방해하지 않도록 해안선 근처 건물은 밝은 무채색으로 칠해진다. 건물의 ‘색’이 형태와 기능을 압도하거나 이끌면 안 된다. 건축물의 구조와 기능에 적합하게 색을 집어넣는 것이 진정한 도시색채 전문가의 태도다.”

- 도시색채학의 모범사례로 불리는 곳이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이라고 들었다.
“프랑스 파리는 색채의 통일성과 전통적인 연속성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건물을 사암으로 짓던 전통을 이어 최근 지어진 신도심의 건물들도 사암색이다. 건물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조색을 무채색으로 해, 보여야 할 것들이 눈에 잘 들어오도록 했다. 이 때문에 파리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 같고, 세련되고 정돈된 이미지를 갖는다. 그래서 나는 파리를 ‘배경이 되는 도시’라고 부른다.

영국 런던은 상징색이 있는 도시다. 1930년대부터 영국을 상징하는 색이었던 빨강과 검정을 도시색채에 차용했다. 공중전화부스, 우체통, 2층 버스 등의 도시구조물을 빨강으로, 택시와  쓰레기통 등은 검정으로 색칠했다. 런던도 파리와 마찬가지로 일관된 주조색으로 색채가 정돈돼있다. 상징색을 통해 단조로울 수 있는 도시에 악센트를 줬다.” 

- 현재 세계 도시색채의 동향은 어떤가
“한국 사람들이 유럽을 좋아하는 이유는 색채가 세련됐기 때문이다. 유럽은 건물 지붕색과 외벽 주조색이 통일돼있어 알록달록 산만하지 않다. 파리와 미국 동부는 회색, 일부 유럽 국가들은 주로 주황색 지붕으로 통일돼 있다. 최근의 성숙한 도시색채 방법론은 통일이다. 즉, 도시 전체적 관점을 보는 것이다.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특화지역들도 있다. 통일성은 없지만 감각적이고 화려한 색채를 통해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킨다. 프랑스 파리의 라빌레또 공원은 기존 파리의 기조색을 배경으로 원색의 조형물 폴리 28개를 격자로 심어 악센트를 줬다. 탱고의 본고장이자 마라도나의 고향인 아르헨티나 라 보까(La boca) 곳곳에는 유희적인 색채들로 가득 차있다. 전통적으로 지역색이 화려한 곳도 있다. 멕시코의 오아하까(Oaxaca)는 원색을 간직한 자연환경에 맞게 건물이 색색이 빨강, 파랑, 노랑으로 칠해져 있다.”  

- 한국의 도시색채는 어느 정도 수준인가 
“한국은 도시색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근세까지는 북촌이나 삼청동의 기와나, 초가로부터 느껴지는 고유의 색채가 있었지만, 빠른 산업화로 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고유의 도시색채를 잃었다. 체계적 방법론 없이 저렴한 페인트 색에 의지했고, 도시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다. 서로 눈에 띄기 위해 간판 경쟁을 벌이며 맥락 없는 화려한 간판들이 건물을 뒤덮어버렸다. 이게 최근까지의 한국 도시색채의 현주소였다.”

- 한국도 변하고 있지 않은가. 서울시가 최근 모범사례라고 들었다.
“2007년 경관법이 시행되면서부터 공공기관과 지자체를 중심으로 도시 디자인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특별히 앞선 곳이 서울시였다. 서울시는 먼저 공공시설물의 색을 정리했다. 보여야 할 것들이 보이기 위해 죽어야 할 색은 죽였다. 주변 경관을 잡아먹던 산책로의 빨간 자전거도로와 노란 펜스, 그리고 도로에서 운전자의 시선을 분산시켰던 녹색 육교 색을 눈에 잘 안 띄는 무채색으로 바꿨다. 지금 서울시는 공공디자인을 국제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체계도 잘 확립한 상황이다. 지자체의 소도시도 영향을 받아 서울시와 비슷하게 돼가고 있다.

신도시인 세종시의 경우, 건설 초기부터 ‘도시색채 종합계획’을 적용했다. 지붕색을 회색으로 통일하도록 강력하게 규제하고 주조색의 틀을 만들었다. 다이나믹한 색채로 도시 전체에 악센트를 주는 특화지역도 계획돼있다. 마치 파리가 연상되지 않나.”

- 도시색채학의 매력은 무엇인가 
“석사까진 건축디자인을 전공했고 박사과정으로 도시색채를 전공했다. 박사과정 전공을 선택할 때 학문적으로 접근할만한 요소로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이 색채학이었다. 색채는 디자인에 미치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쉬운 설계 요소라고 생각했다. 또 조화롭지 않은 도시를 색채를 통해 조화롭게 정돈한다는 점이 나에게 매력적이다.”

-도시색채학 지도자로서의 과제와 목표가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아직 규명되지 않은 색채학의 영역을 연구하고 싶다. 생리적, 감성적 측면의 색채학은 많이 규명됐다. 하지만 빛과 조명의 인체안정성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이 부분의 정확한 관계를 규명하고 싶다. 또한 도시색채학 지도자로서, 도시색채에 대한 시민의식을 개선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싶다. 한국은 공공기관이나 지자체가 도시색채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민간에서는 도시색채에 대한 시민의식이 거의 전무하다. 도시색채는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도시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도시색채에 대해 관심을 갖고 도시색채 안목과 자부심을 갖는 게 선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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