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경영학과 96학번) 해설위원은 선수 시절 타자와의 정면승부를 피하지 않는 공격적인 투구로 유명했다. “제 성격상 볼카운트를 불리하게 가져가며 질질 끌려가는 걸 싫어했어요. 타자에게 칠 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던졌다가 많이 맞기도 했죠.” 그에게 좋은 투수란 타자와의 승부를 즐기는 투수였다. “강타자와 붙어보기도 전에 정면 대결을 피하면 오히려 밸런스가 무너져 더 안 좋아져요. 자기 공에 자신감을 가져야죠.”
 
고교시절부터 공격적인 투구로 타자를 제압해온 김선우 해설위원은 한국인 투수 중 5번째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당시 배리본즈가 있었던 샌프란시스코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둘 정도로 임팩트 있는 모습도 보여줬다. 2008년엔 한국으로 돌아와 두산베어스에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 동안 40승을 거두는 등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제는 MBC Sports Plus에서 메이저리그 해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 김선우(경영학과 96학번) 해설위원이 자신의 패스트볼 그립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 김지현 기자 knowise@
타고난 어깨 힘으로 떡잎부터 달랐던 대형투수
김 위원이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야구부 감독 앞에서 멀리 던진 공 때문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타고난 어깨 힘으로 또래보다 빠른 공을 던지며 단숨에 눈에 띄는 선수가 됐다. 이후 그는 신월중을 거쳐 야구 명문 휘문고에 진학했다. 김 위원은 1994년 고교 2학년 때 49회 청룡기 결승에서 2실점 완투승으로 휘문고 야구부 창단 87년 만에 첫 우승을 선사했다. “당시 장충고를 상대했는데 2점 홈런까지 쳐서 기분이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 최고의 경기로 기억한다.” 김 위원은 이 대회에서 최우수 선수상과 우수 투수상을 받았다.
 
이때부터 김 위원은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눈에 띄게 됐다. 그중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팀은 보스턴 레드삭스였다. 김 위원은 “보스턴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관심을 표했다”며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미국행을 설득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김 위원은 고려대를 택했다. 김 위원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대학교 졸업장이 더욱 필요했을 때였고, 부모님도 그걸 원하셨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위원이 고려대를 택한 것엔 숨은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연세대 쪽에서도 제안이 왔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위원이 고려대를 택한 이유는 메이저리그 때문이었다. 김 위원은 당시 대학교에서 뛰다가 다시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오퍼가 왔을 땐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연세대는 졸업 전까지는 저를 미국으로 보낼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고려대는 다시 오퍼가 왔을 때 미국 진출할 실력이 된다면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곧장 고려대를 선택했죠.”
 
본교 96학번으로 입학한 김선우 위원은 2학년 재학시절인 1997년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하게 된다. 김 위원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학교에 당시 계약금 중 일부인 3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는 “제 꿈을 배려해준 학교에 너무 감사했다”며 “후배들이 좋은 선수로 성장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기부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은 고려대 시절에도 청소년 대표팀으로 발탁되는 등 대형투수로의 성장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는 정기전의 마운드는 한 번도 서보지 못할 만큼 인연이 없었다. 김 위원은 “1학년 때는 한총련 사태로 경기가 취소됐고 2학년 때는 비 때문에 등판이 밀렸다”며 “정기전에서 투수로서 연세대와 상대해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결코 만만치 않았던 메이저리그 생활
여러 팀의 오퍼를 받은 김 위원이 보스턴을 택한 것은 예전부터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온 보스턴에 마음을 뺏겼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1998년 싱글A, 1999년 더블 A, 2000년 트리플A까지 한 단계씩 올라가더니 마침내 2001년 메이저리그에서 데뷔했다. 처음 경험했던 메이저리그의 벽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내 볼이 강하고 빠르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미국으로 가보니 나처럼 던지는 선수가 많아서 당황했다”며 “만만히 볼 곳은 아니라는 걸 곧바로 느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2005년 시즌 도중 팀에서 지명할당 되면서 김병현 선수가 뛰고 있는 콜로라도 로키스로 이적하게 된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 경기장 쿠어스필드는 고산 지대에 위치해 타구가 타구장에 비해 멀리 나가 ‘투수들의 무덤’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김 위원의 메이저리그 전성기는 이곳에서 시작됐다.
 
2005년, 메이저리그 데뷔 이래 5경기 이상 출장한 시즌 중 가장 좋은 4.22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했다. 또한 그는 그해 한국인 최초로 쿠어스필드에서 완봉을 기록하기도 한다. 그는 “한국 선수와 같이 지낸다는 게 큰 힘이 됐다”며 “병현이와 같이 지내다 보니 심리적으로 안정이 된 게 가장 주요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그에게 냉정했다. 콜로라도에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다음 해 9월 신시내티로 트레이드 됐고 시즌이 끝난 후엔 팀에서 방출을 당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지만 메이저리그로 올라오진 못했다. 결국, 2008년 두산과 계약을 맺으며 김선우 위원의 메이저리그 생활은 끝이 났다. 그가 한국행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었다. 김 위원은 “마이너에 있으면서 가족들 생각이 더 많이 났다”며 “그때부터 나보단 가족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한국행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부상으로 꾀한 변화, 반전 성공한 한국 생활
그동안 한국야구도 많이 성장해서였을까. 그의 한국 프로야구생활도 쉽지 않았다. 계약금 9억 원, 연봉 4억 원을 받으며 큰 기대 속에 두산 베어스에 입단한 그는 첫 시즌은 평균자책점 4.25, 두 번째 시즌은 5.11로 좋지 못했다. 자신이 가진 빠른 공으로 타자를 제압하려 했지만, 당시 한국 타자들은 빠른 공에 적응한 상태였다. 그는 “KBO 타자들의 능력이 좋았다”며 “중심타선은 메이저리그 타자들처럼 공격적인 배팅을 했고 하위타선은 공을 오래 보며 짧게 끊어서 치며 대응해 까다로웠다”고 말했다.
두 시즌을 힘들게 보냈지만, 그에게 반전의 계기가 찾아왔다. 세 번째 시즌을 준비하는 도중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면서 투구 패턴과 구종에 변화를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시즌을 앞둔 캠프 전에 다친 건데 어깨나 팔 쪽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은 계속 던져야 했다”며 “빠른 볼만 믿지 않고 변화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타자들은 변화된 그의 투구패턴과 더욱 날카로워진 제구력에 당황했다. 김 위원은 2010년 시즌 13승 6패 4.02의 평균자책점으로 반등에 성공하더니 2011년 시즌엔 16승 7패 평균자책점 3.13으로 다승 2위, 평균자책점 3위를 기록했다.
그 이후 2년 동안 다시 부진에 빠졌고 은퇴 전 마지막 해엔 LG와 계약을 맺었지만 좋지 못한 성적으로 2군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그해, 2014년 11월 은퇴를 결정하게 된다. “은퇴는 언제 하는 게 좋을까 생각했을 때 내린 답은 하나였어요. 나답게 야구를 못하게 됐을 때 그만두자.”
13년의 프로생활을 마무리한 후 은퇴한 그는 해설위원으로서의 새로운 길을 걸었다. 그는 은퇴 후 1년 정도 휴식기를 가질 거라 생각했지만, MBC Sports Plus에서 해설가의 길을 제안받아 그해 2014년 12월 메이저리그 해설가로 데뷔했다. 그는 “그곳에서 뛴 경험과 생각을 말로 표현해보고 싶었다”며 “선수들의 심리적인 부분을 많이 언급하는 게 내 해설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선 올해 남은 기간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되돌아볼 것이라 했다. 그는 “최근 2년 동안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며 “조금의 휴식기를 가지며 2년 동안 내가 해설을 잘했는지 되돌아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후에 그는 다시 야구와 관련된 일을 찾아볼 예정이다. “계속 해설을 할 수도 있고 지도자가 될 수도 있어요. 어떤 일을 할진 모르겠지만 제가 한국야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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