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의 <Daddy>부터 EXO의 <으르렁>, A.O.A의 <사뿐사뿐> 그리고 빅뱅의 <맨정신>까지. 최근 인기를 끌었던 대중가요의 뮤직비디오에선 그래피티를 활용한 장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힙합 코드가 대중문화로 자리 잡으며 힙합의 4대 요소 중 하나인 그래피티를 향한 대중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랩, 댄싱, 디제잉과는 달리 그래피티는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도시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 안국역 1번 출구에서 1분 정도 걸어가 보자. 한복을 빌려 입은 학생들, 고즈넉한 궁궐의 뒤뜰을 거니는 외국인들. 그 사이로 흐릿한 그래피티들이 눈에 띈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레오다브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독립운동가 시리즈 그래피티를 선보였다.
▲ 주한미군 부대 근처, 승객 없던 한여름 새벽, 레오다브는 스프레이를 들었다.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6호선 녹사평 역에는 독립운동가들이 그려졌다. 사진 | 김주성 기자 peter@
화려함으로 생기를 불어넣다
화려한 색감과 거친 표현 기법. 형형색색의 스프레이로 그려진 그래피티는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투박한 벽에 활기를 불어넣는 그래피티는 최근 상가 인테리어로 그 가치를 높이고 있다.
 
안암동 참살이길에 위치한 주점 피에스타 입구엔 오토바이, 버블 등의 그래피티가 가득하다. 피에스타 박재영(남·44) 사장은 “가게를 오픈하고 난 뒤 계단이 허전해서 그래피티를 그리게 됐다”며 “시설 인테리어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눈에도 확 들어와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성북구 돌곶이역 인근에 체육관을 오픈한 지문실 복싱클럽의 지문실(남·49) 관장도 얼마 전 벽면 전체에 그래피티를 그려 넣었다. 지문실 관장은 “체육관의 활기찬 분위기와 밝은 느낌을 살리고 싶어서 그래피티 인테리어를 받게 됐다”고 말했다.
 
고급 시설의 상징인 호텔에서도 그래피티를 찾아볼 수 있다. 광진구에 위치한 더 디자이너스 호텔 건대점에는 천장부터 화장실까지 감각적인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는 호실이 마련돼 있다. 객실의 인테리어를 맡았던 그래피티 아티스트 범민 씨는 “그래피티가 갖는 시각적인 화려함은 보는 이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준다”며 “최근 힙합 가수나 아이돌의 뮤직비디오 혹은 실내 인테리어 등으로 그래피티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담벼락에 목소리를 그리다
그래피티는 상업 예술뿐 아니라 사회에 메시지를 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작년 11월 13일 서울 신촌 지역과 대학로 일대 건물 벽면에서 욱일승천기를 연상시키는 배경 앞에 박근혜 대통령이 그려진 그래피티가 발견됐다. 그림 하단에는 ‘사요나라 2015.11.14.’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래피티가 발견된 다음 날인 14일은 민중총궐기가 예정돼 있었고, 같은 날 박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해외 순방 일정을 떠날 차였다. 
 
지난 5월 11일 ‘주한미군이 용산의 미군기지 내 실험실에서 지카 바이러스 실험을 추진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는 내용의 기사가 JTBC를 통해 보도됐다. 며칠 뒤 홍대거리 주변 담벼락에는 ‘zika virus put’이라는 내용의 주한미군 생화학실험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그래피티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피티에는 문구와 함께 모기가 그려져 있었는데, 몸통 가득히 별이 그려져 있고 얼굴은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이화여대 힙합 동아리 라온소울의 그래피티 팀장 김서현(여·21) 씨는 “그래피티는 사회를 향해 메시지를 전할 때 자주 사용된다”며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한눈에 알 수 있게 직관적으로 나타내는 점이 그래피티의 진정한 매력”이라고 말했다.
 
허가받지 못하면 여전히 불법
상업 예술로서의 그래피티는 위법의 선을 넘는 경우가 드물다. 약속된 장소에서 원하는 이미지대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반면, 허가받지 못한, 누구도 원치 않았던 그래피티는 처벌의 대상이 된다. 작년 5월 10일 대구지하철 사월역 전동차에서 ‘BLiND’라 적힌 그래피티가 발견됐다. CCTV 분석 결과 범인은 지하철 환풍구를 뜯고 철로에 있던 전동차까지 내려와 그림을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현행법상 지하철역에 몰래 잠입해 그래피티를 그리면 ‘공동재물손괴’와 ‘공동건조물침입죄’로 처벌을 받는다.
 
일각에서는 그래피티를 법으로 제지해야 하는 이유로 ‘깨진 유리창 이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래피티의 거친 느낌이 시민에게 위화감을 주고 폭력과 절도 등의 도시범죄로 발전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늦은 시각 인적이 드문 장소를 골라 빠르게 그림을 그리고 사라지는 그래피티 범죄에 일일이 대응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피티 위한 허용 공간 늘려야
그래피티 범죄를 줄이기 위해 전문가들은 그래피티를 위한 허용 공간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태호(경희대 미술대학) 교수는 “사유재산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법적으로 위법이기에 압구정 나들목처럼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더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는 그래피티 범죄를 줄이기 위해 역으로 그래피티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다. 헬싱키 정부는 1990년대부터 점차 늘어나는 그래피티 범죄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다. 많은 예산을 투자하고 단속 인력도 늘려 그래피티를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확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에 헬싱키 정부는 그래피티 허용 구간을 8곳에서 11곳으로 늘리고, 2014년부터 그래피티에 필요한 도구와 페인트를 제공했다.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 범죄를 줄이려는 의도에서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범민 씨는 SNS가 부족한 작업 공간의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피티 자체가 장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예술이기에 공간 부족은 영원한 딜레마”라며 “최근엔 SNS가 발달해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을 찍어 올리는 것으로도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태호 교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의 여유’와 더불어 그래피티를 문화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경우 해외와 달리 아직까지 시각적 이미지에 대해 낯설고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래피티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행위를 하나의 예술로 허용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피티는 거리 예술이기에 창의성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예술은 더 이상 존중받을 수 없다. 그래피티를 예술로 만들 것인가, 범죄로 만들 것인가. 대답은 오롯이 스프레이를 쥐는 그 손에 달려있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