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26일 '백남기 농민 추모 촛불문화제'에서 한 청년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불 밝힌 초를 들고 있다. 사진 | 심동일 기자 shen@

지난해 11월 14일,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한 농민이 쓰러졌다. 9월 25일, 317일 동안의 사투 끝에 그가 사망했다. 그의 이름은 ‘백남기’다.사망진단서에 의하면 사인은 ‘병사’라고 한다. 경찰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장례식장을 점거하고 법원에 부검 영장을 신청했다. 시민들은 그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장례식장 앞에서 밤을 새우고, 촛불 문화제로 고인을 추모했다.

9월 26일 촛불문화제에는 1000여 명의 시민들이 3층 장례식장 앞을 가득 메웠다. 여러 언론사의 카메라도 이곳저곳 자리했다. 몇몇의 추모객은 지난 1년간의 언론보도 행태에 불만을 표시했다. “사이비 언론은 물러가라”, “제대로 보도만 했어도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라며 여기저기서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바탕 소동이 마무리된 뒤,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촛불문화제가 진행됐다. 이 날 문화제에는 세월호 유가족, 농민, 국회의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해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을 요구했다.

세월호 사고로 아들을 잃은 김동혁 군의 어머니는 “10월 1일로 세월호가 침몰한 지 900일째가 된다”며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것에 대해 규탄했다. 그는 “세월호가 선례가 돼 진실을 밝히고 국가의 사과를 받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진실 규명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고는 항상 우연히 일어나지만, 그 불행이 누군가가 만든 것이라면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농민들의 발언도 이어졌다. 그들은 농민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분투한 백남기 농민을 회상했다. 전남에서 농사를 짓는 최육봉 녹색연합 공동운영위원장은 “경제적 난국은 농민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의 연소득은 1000만 원 남짓인데, 빚은 3000만 원이다.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이는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백남기 선생은 이런 상황에 분노를 느껴 민중총궐기에 참여했고, 정부는 한 시민으로 참여한 그를 물대포로 대응했다. 민주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말하는 것조차 위험한 시대가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의 발언이 끝나자 추모의 노래들이 이어졌다. 노래패 ‘우리나라’가 생명의 노래를 부르며 “얼마나 더 죽어야 하나”라고 선창하자 사람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따라 불렀다. 정희수(서강대 철학14) 씨는 작년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던 친구를 떠올리며 국가의 폭력을 직접 목격했던 경험을 상기했다. “작년 민중총궐기에서 친구가 부상을 당해 응급차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송 중에도 물대포는 응급차를 조준했다. 이런 현실에 대한 분노를 개인적으로 표출하기보단, 문화제에 참여해 집단적으로 의견을 모으고 싶었다.”

그렇게 매일 촛불 문화제는 계속됐다. 수백의 사람들이 모여 발언대에 섰다. “정부는 사죄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목소리 뒤로 유가족들은 빈소를 지켰다.
여느 장례식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빈소 안은 조용했다. 꽃을 나눠주는 움직임 하나하나 조심스러웠다. 길게 줄 지은 시민들은 신을 벗고 빈소로 들어섰다. 가운데에 놓인 사진 속 백남기 씨는 웃고 있었다. 헌화와 묵념을 한 뒤 유족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시민들은 바닥만을 내려 볼 뿐이었다.

9월 28일, 법원은 시신 부검에 대한 영장 발부를 해달라는 경찰의 요구를 조건부로 받아들였다. 유가족들은 곧바로 반대 의사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현재 경찰은 장례식장에 일부 병력만 남기고 철수한 상태다. 영장의 기한은 10월 25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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