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초거대 소행성이 조만간 지구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뉴스가 TV를 통해 보도되던 순간. ‘초거대’와 ‘소행성’이 조응할 수 있는 낱말이냐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조만간’의 함의에 대한 의문도 없었다. 누군가는 일찌감치 무시했다. 누군가는 채널을 돌렸다. 누군가는 위키피디아에서 ‘지구 종말’ 항목을 뒤적였다. 누군가는 지루한 표정으로 핸드폰게임을 틀었다. 누군가는 술집의 쾅쾅거리는 음악소리 때문에 애초에 듣지도 못했다. 지구인들에게 소행성이란 그런 존재였다. 누군가는 호프집에서 학회장 J에게 멱살을 잡혔다. 용준은 동료들과 함께 J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소주잔 몇 개가 테이블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파열음이, 깨진 컵의 단면이 J의 이성을 찢어 놓았다. 그는 더욱 몸부림쳤다. 미쳐 날뛰었다. 그에게 멱살을 잡힌 상대도, 그의 허리를 감은 용준도 어떤 행성의 탄생처럼 한데 덩이져 들썩였다. 뉴스가 보도되는 불과 몇 분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앵커가 기자에게, 과연 지구 종말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라고 물었다. 아무도 듣지 못했다. 무시하느라, 다른 채널을 보느라, 위키피디아를 뒤지느라, 게임을 하느라, 술을 마시느라, 멱살을 잡느라, 잡히느라, 말리느라, 덩어리지느라. J가, 이 자본주의의 개 같은 새끼들아! 라고 외쳤다. J의 성마른 외침은 용준에게도, 동료들도, J에게 멱살을 잡힌 자본주의의 개 같은 새끼(경영학과의 모 마케팅학회 소속이라고 했다)에게도, 개 같은 새끼의 동료들(멱살을 잡힌 이와 같은 학회 소속이라고 했다)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기자가, 그럴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라고 답했다. 카운터에 앉은 중년 여자가 하품을 하며 박스테이프로 칭칭 동여맨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뻑뻑한 버튼을 간신히 눌러 채널을 돌렸다. 지랄하고 있네 병신들, 개나 소나 별이고 행성이지, 이 리모컨도 삼성三星이다 에라이. 노스트라다무스와 Y2K와 마야력을 무사히 견뎌내고 이십오 년째 K대학 후문 앞에서 낡은 호프집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홈쇼핑과 예능프로를 지나 연속극에 다다랐다. 누가 누구와 바람이 났고, 누구와 누구는 알고 보니 친남매였다는, 너무 극단적이라서 오히려 뻔한 내용을 하품을 해대며 보았다. 아니, 보아 넘겼다. 그녀의 표정은 벽에 걸린 달력의 벌거벗은 여자처럼 공허했다. 드라마는 구태의연했지만 그녀에겐 대학생들의 싸움질이, 소행성 충돌이, 지구 종말이 더 구태의연했던 것일까. J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도, 잔이 떨어져 깨지는 것도, 박살난 파편이 조명을 가르는 것도, 지구에 불덩어리가 떨어지는 것도 모두 그랬던 것일까.
 
용준의 팔뚝이 별안간 화끈거렸다. 희멀겋게 자란 누군가의 손톱이 그의 팔뚝을 갈겼다. 해파리에 쏘인 것처럼 붉은 줄이 그어졌다. 얇은 살갗이 톱으로 켠 듯 일어났다. 아이 씨발. 감각이 되살아났다. 쓰라렸다. TV가 보였다. 소리가 들렸다. 누가 누구의 뺨을 갈기는 중이었다.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미안해, 하지만 난 이제 널 사랑하지 않아. 나쁜 새끼. 여자가 자신을 떠나는 남자의 등을 보며,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세상이 끝난 것처럼
세상이 끝난 것처럼
 
이모, 아까 그 뉴스 좀 틀어주세요. 용준이 다급히 외쳤다. 그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여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리모컨을 낑낑거리며 눌렀다. 다시 나타난 앵커가 기자에게, 그렇다면, ‘정말로 만약에 충돌한다면’(앵커는 이 부분에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예상되는 피해는 얼마나 되는 겁니까?, 라고 물었다. 기자가 앵커에게, 이 정도 크기의 소행성이 ‘지구에 떨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기자는 이 부분을 유난히 힘주어 말했다) 정확한 예측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현재 지구 부근으로 접근중인 소행성이 약 6500만 년 전에 공룡을 멸종시킨 소행성보다 수십 배는 더 큰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정말 진짜로 혹시라도 충돌한다면’ 피해 또한 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앵커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상당하다고 하는 게 정확히 어느 정도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공룡 대멸종도 실제론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일어난 것이잖아요.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대비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그러자 기자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냥 다 죽는 거라고 봐야겠죠.
 
앵커가, 김기자님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보도를 마무리했다.
 
J가 개 같은 새끼의 멱살을 놓았다. 개 같은 새끼는 진짜 목에 가시가 걸린 개새끼마냥 캑캑거렸다. 기침 소리가, 그냥 다 죽는 거라고 봐야겠죠, 에 파묻혔다. 앵커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아직 충돌 여부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시청자 여러분은 너무 동요치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며 다음 뉴스로 넘어갔지만 그 역시도 그냥 다 죽는 거라고 봐야겠죠, 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개 같은 기분이었다. J와 용준을 비롯한 호프집 안의 사람들은 소란을 피우던 이유도 잊은 채 멀거니 서서 TV만 쳐다봤다. 여자도 그제야 리모컨을 내려놓고 TV를 향해 목을 뺐다. 소행성 충돌이라니. 모두들 한 번쯤은 들어본 듯한, 어쩌면 지구에 매일같이 떨어지는 수 톤의 유성처럼 흔해빠진 소식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래서 믿었다. 그들은 그래서 믿지 않았다. 그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무덤덤하게 흘려 넘겼다. 애써 무시했다. 야 용준아, 저게 지금 무슨 소리냐. J가 헐거워진 안경을 추켜올리며 용준에게 물었다. 글쎄요, 그냥 다 죽는대요. 용준이 팔뚝에 난 상처를 호호 불며, J의 목 늘어진 티셔츠를 쳐다보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J의 목에도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결을 거슬러 일어난 살갗 아래로 피가 점점이 맺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격렬한 섹스의 흔적이라 생각할 성싶었지만 용준은 J를 알았다. 학회에 들어온 지 고작 한 달 남짓이었지만, 서른을 목전에 둔 그의 머릿속엔 혁명뿐라는 것을, 전위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했고, 어정쩡한 화해를 했고(자본주의의 개 같은 새끼는 전화기를 꺼내 여자친구로 보이는 누군가와 울먹이며 통화를 했다, 뉴스 봤어? 보고 싶어, 사랑해, 같은 대화를 나눴다기보단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깨먹은 술잔 값을 보태 술값을 치렀다. J가 실금으로 빽빽이 뒤덮인 학회비 카드를 내밀었다. 회비를 걷는 월초가 가까워져서인지 카드가 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용준은 J와 나머지 학회 선배들을 뒤따라 나가면서 달력을 흘끔거렸다. 작위적인 가슴을 내미는 여자의 표정에서 종말이라곤 종잡을 수조차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 담겨 있는 것은 오직 포르노로 전향한 남성들을 돌아 세우기 위한 전투적 사명감뿐이었다. 용준은 문득 4월 밑으로 켜켜이 쌓인 나체들이 궁금해졌다. 기왕이면 그것이 승희이길 바랐다.
 
다음날부터 TV에선 속보만 방송되었다. ‘정말 진짜로 혹시라도 충돌한다면’은 현실이 되었고, ‘조만간’은 구체적 날짜로 형상화되었다. 대통령이 마침내 성명을 발표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는 검정색 정장을 입고 침통한 표정으로 한반도의 오천 년 역사를 되짚었다. 해방 이후의 역동을 훑었다. 그가 읊은 역사에 대통령 자신이 차지한 것은 고작 삼 년이었다. 그는 그것들이 디-데이를 기점으로 모두 한 순간에 사라질 것이라고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사라진다’는 단어를 말하는 그의 입이 돌연 굳게 닫혔다. 입 옆으로 난 팔자주름이 더욱 깊게 패였다. 운동권에서 시작해 야당으로, 그러다 여당으로, 다시 야당으로, 다시 여당으로 당적을 옮겨 다니며 마침내 얻어낸 대통령직에 대한 미련도 그처럼 깊을 것이었다. J는 체제와 현실에 굴복한 비겁한 새끼라며 그를 욕하곤 했다.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항공우주국에서 발표한 디-데이는 2016년 5월 2일이다. 어떤 방법을 찾아봐도 이 국면을 타개할 방법은 없다고 한다. 말 그대로 종말이다. 실로 유감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라. 당황하지 말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라.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라. 그러면 오늘 같은 내일이 올 지도 모른다. 나 또한 나의 위치에서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겠다. 혹시 모를 기적을 위해 기도하겠다.
#단락 1 – 지구로 접근 중인 소행성
 
용준의 손이 미완의 플래카드 위에서 바들거렸다. 빨갛고 파란 매직이 부러 이상한 방향으로만 골라 움직이는 듯했다. 실패였다. 그는 새 하드보드지를 꺼냈다. 또 실패했고, 새 하드보드지를 또다시 꺼냈다. 멀찍이서 총무의 눈빛이 불안에 차 흔들거렸고 용준은 애써 외면했다. 욕지기를 속으로 삼켰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반값등록금’을 빨간 매직으로, ‘실현하라!’를 파란 매직으로 적었다. 글씨가 벌레 먹은 자국마냥 꿈틀거렸다. 바닥에 쌓여 있는 실패작들에 적힌 글자들 또한 거세게 물결쳤다. 매직의 구불구불한 자취를 좇는 동공이 덩달아 전율했다. 하지만 용준의 전율은 J가 입에 달고 다니는 ‘전위’니 ‘혁명’이니 하는 것들과는 달랐다. 시대정신도 재벌타도도 노동자 연대의식도 아니었다. 피로와 짜증과 멋들어지게 써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또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초조함이었다. 용준은 이미 쓰고 있는 문구의 의미조차 잊은 지 오래였다. 무엇이 반값이고, 무엇을 실현해야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구가 사라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남짓이었다. 다음 학기 등록기간은 서너 달 뒤였다.
 
전화기가 주머니 속에서 떨렸다. 용준은 학회실을 슬며시 빠져나왔다. 학생회관 복도가 평소와 달리 적막했다. 요즘 들어 계속 그랬다. 바로 옆방인 밴드 합주실에서 매일같이 들려오던 드럼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유난히 조용했던 며칠 전 세미나를 떠올리며, 용준은 새삼 종말을 실감했다. 고요가 마치 종말을 예고하는 선율 같았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교정이 휑했다. 용준은 모두들 집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두들 틀어박혀 가족들과 눈물의 저녁식사를 하거나 부모의 눈살에도 아랑곳 않고 게임에 빠져 있거나 어색함도 채 지우지 못한 상대와 낯선 섹스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포기한 상상이었다. 전화기가 여전히 떨렸다.
 
용준은 엄마와 통화를 했다. 전화기의 떨림은 성토였고, 의심이었다. 애원이었다. 이번에도 전위는 없었다. 집에 좀 내려오라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뉴스 보고서도 그러는 거야? 용준은 조만간이라며 얼버무렸다. 조만간 갈 거야. 지금 하고 있는 게 있어서 그래. 그의 엄마는 ‘조만간’에 애닳아했다. 조만간 소행성이 떨어질 것이었으므로, 조만간 모두 죽을 것이었으므로, 조만간 영영 볼 수 없을 것이었으므로, 목소리를 더욱 떨었다. 떨면 떨수록 혁명과는 멀어졌다. 그가 망친 플래카드 글씨 같았다. 절박함에 가까워졌다.
 
도대체 학교에서 뭘 하는데 그래?
너 어디 뭐 이상한 데라도 들어간 건 아니지?
 
용준이 전화를 끊었다. 텅 빈 복도를 지나 학회실 문을 열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자본주의연구반은 그의 엄마가 말하는 바로 그 ‘이상한 데’의 원형이었였다. 이상한데 이상한 것을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더 이상한 곳이었다. 그를 포함해봤자 다섯이 전부인 부원들이 맡은 일을 이어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깃발을 만들었고, 누군가는 선전물을 타이핑했다. 권태로운 광경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노동절을 한 주 앞둔 4월의 말미였다. 용준에겐 스무 살의 첫 4월이었다. 벽에 걸린 달력은 이미 5월로 넘어가 1일에 쳐진 붉은 동그라미를 내보였다. 호프집 달력의 유두처럼 눈에 띄는, 그러나 그뿐인 동그라미였다. 용준은 플래카드 앞으로 돌아왔다. 매직을 그러쥐었다. 그대로 멈췄다. 손이 떨렸다. 전화통화 때문에 잠시 멈추었던 짜증이 되돌아왔다.
 
J는 널찍한 책상에 전지를 펼쳐놓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대자보를 쓰고 있었다. 그는 용준이 적은 플래카드를 흘끗 보더니 혀를 끌끌 차며 그에게 다가갔다. 야, 용준아. 네 선배. 다시 써라. 넌 어릴 때 서예도 배웠다는 놈이 이렇게 밖에 못 쓰냐? 네 선배. 용준의 속이 뒤틀렸다. 부러 ‘이것 밖에 못 쓰겠냐?’를 자르며 대답했다. 그러나 J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의 음성에선 케케묵은 담뱃진과 커피가 뒤섞인 냄새가 났다. 혁명의 냄새였다. 그는 혁명과 관련된 연설을 할 적마다 커피를 들고 줄담배를 피웠다. 종말의 냄새였다. 죽음뿐인 미래에 절망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난간에 기대 커피를 마시며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는 게 전부일 테니. 용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이래가지고 등록금이 깎이겠어? 사람들 마음이 움직이기나 하겠어? 이래서 행렬이 차벽을 돌파할 수 있겠냐고. 반듯하게, 격정적으로 쓰란 말이야. 니가 쓰는 반값등록금이 칼날보다 더 날카로워야 그게 사람들 심장을 파고들고 등록금을 반으로 잘라내는 거다 용준아. 등록금을 잘라내면 하나의 부조리가 잘려 나가는 거고, 그러다보면 자본주의의 모순도 잘리기 시작하는 거다. 네 선배. 전위다 용준아. 언제나 전위를 잊으면 안 된다. 네 선배.
 
개새끼
 
칼날 갈다가 물대포에 대가리부터 깨질 거다 씹쌔끼야. 용준은 하드보드지를 새로 꺼냈다. 총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용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조악했다. 뜯어진 벽지, 반쯤 떨어진 커튼, 무엇보다도 학생회관 구석에 버려진 듯 들어 있는 학회실 위치부터가 그랬다. 햇빛도 잘 안 들어오는 그늘진 귀퉁이에서, 그들은 대낮부터 야학을 했다. 그늘 속에서 자본론은 더욱 은밀해졌고,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목소리를 낮췄다. 낡아빠지긴 했어도 학회실이 있다는 것은 중앙동아리에 속해 있다는 뜻이었다. 한 학기에 한 명 들어올까 말까(그 한 명이 바로 용준이었다)한 운동권 학회를 동연은 왜 중동이랍시고 데리고 있는 것일까, 라고 용준은 매 주 의문을 품었다. 세상이 없어지려는 이 시점에서, 용준은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쓸모없는 존재임을 느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는 J가 술집에서 늘 외치는 권주사였다. 하지만 5월 2일이 지나면 세상은 없을 것이고, 간신히 살아남은 누군가는(살아남을 일도 없겠지만) 불타죽은 쥐새끼의 가죽을 돌칼로 벗기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용준은 J를 떠올렸다. 그의 덥수룩한 머리가, 펑퍼짐해서 유행에 한참 뒤떨어지는 바지가, 파리한 수염자국이 모두 반쯤 익은 날고기를 뜯고 풋내 나는 들열매를 씹는 5월 3일과 잘 어울렸다.
 
가위로 얼기설기 자른 깃발에서 떨어진 실밥이 바닥에 고였다. 선전물의 디자인은 물고기처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J가 있던 자리를 서슬 퍼런 눈으로 쏘아봤다. 어디 얼마나 잘 썼는지 좀 보자는 심정이었다. 기대와는 무색하게, 전지를 빼곡히 채운 글씨는 뽑아낸 듯 단정하고 가지런했다. 용준은 별 수 없이 플래카드에 고개를 처박았다. 존나와 씨발을 웅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저 정갈하고 차분한 글자가 전위보단 설득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했다. 설득은 종말에 파묻혀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무위에 그친 대자보가 순교자처럼 묵묵히 매달려 꽃가루에 뒤덮일 광경을 떠올리자니 괜히 안쓰러웠다. 대자보도, J도, 용준 자신도 안쓰러웠다. 손목에 힘줄이 돋아 올랐다. 어쨌든 전위, 전위를 실은 고딕이어야 했다. 용준은 승희가 찾아오길 바랐다. 지금 당장, 아니 오늘 안에라도, 아니 지구가 사라지기 전에만. 그래야만 이곳에 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단락 2 – 학회실에서 노동절을 준비하는 용준 일행
 
술잔 다섯 개가 요란하게 맞부딪혔다. 그들은 노동절을 나흘 앞두고 또다시 호프집에 모였다. 분위기도 후지고 안주도 구렸지만 그들은 언제나 이곳에 모였다. J는 언제나 이 집을 고집했다. 모두들 J의 결정을 수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술만 취하면 소리를 지르고 공산주의 사상을 읊어대고 자본주의를 경멸하다가 시비가 붙어 멱살잡이나 하는 그를 감당할 수 있는 곳은 대학가에 오직 여기뿐이었다.
 
안주를 내려놓는 여자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그녀의 눈이 다섯 개의 손에 쥐어진 다섯 개의 잔을 훑었다. 금간 것은 없는지, 던지지는 않는지, 멱살을 잡을 것은 아닌지를 보려는 듯했다. 용준은 괜히 잔을 움켜쥐었다. TV를 올려다보았다. 또 연속극이었다.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내용은 지난번에 왔을 적과 비슷했다. 또 누군가가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었다. 용준은 이 순간에도 지구를 향해 맹렬히 다가오고 있을 소행성을 떠올렸다. 세상이 곧 끝난다. 형광등 꺼진 호프집처럼 빛을 잃고 소멸한다.
 
그들은 90년대로 돌아간 듯한 호프집에서 며칠 전처럼, 몇십 년 전처럼 술을 마신다. 대통령은 어제 같은 오늘을 보내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오늘 같지 않은 내일을 만들어야 한다. 전화기는 잠잠했다. 엄마는 절을 하는 중일까. 용준의 엄마는 며칠 전부터 절에 나가 절을 한다고 했다. 절을 백팔 번 하면서, 소행성이 지구에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빈다고 했다. 용준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엄마, 만약에 지구가 멸망하지 않으면, 그건 다 엄마의 기도 때문일 거야.
 
승희가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라고 외쳤다. 어제 한 명이 고향으로 내려간 탓에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띄우려고 애쓰는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J를 웃돌았다. 용준은 J가 그녀를 일컬어 혁명전사라고, 행진의 첨병이라고 했던 것을 또다시 실감했다. 그녀가 위하여를 외칠 적마다 용준과 다른 학회원들은 어깨를 움츠리고 귀를 틀어막았다. 용준은 손등이 찌릿 할 정도로 큰 그녀의 목소리가 싫지 않았다. 그녀의 날숨에 밴 술내음도 싫지 않았다. 그녀가 내뱉는 걸쭉한 욕도 싫지 않았다. 그녀의 구호는, 입김은, 욕은, 비틀어진 닭튀김보다도 뜨거웠다. 그녀의 열기는 주변을 빠르게 덥혔고, 외침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 붙었다. 자정 무렵에는 모두들 혁명을 부르짖었다. 혁명은 어느새 존나 혁명이 되었다. 씨발 혁명이 되었다. 그들은 노동절 행진을 마지막까지 존나 씨발 잘 해내기로 결의했다. 용준도 일행을 따라 외쳤다. 승희가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귀가 플래카드의 적힌 ‘반값등록금’보다도 더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어깨를 짚은 그녀의 손가락은 길었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요즘은 소설을 쓴다고 했다. 용준은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그다지 없었다. J와 친한, 한때 자본주의연구반에 몸담았던, 용준보다 나이가 한참은 더 많은 선배. 짧은 컷트머리에 안경을 쓰고 노트북을 들고 조용한 카페에 앉아 담배를 피울 것 같은, 읽어본 적 없는 소설가. 친구 따라 구경 간 OT 세미나에서, 고작 너덧 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민중 혁명이니 어쩌니 외치던 사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던 사람. 그녀는 이미 OB였고, 용준이 학회에 들어왔을 땐 학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가끔씩 학회실에 들어와서는 용준들이 시켜 먹는 짜장면과 탕수육을 두어 입 먹고 가곤 했다. 커피를 사 들고 와서는 잘 하라며 격려하고 가곤 했다. 용준은 어느새 승희를 기다렸다. 기다리기 위해 학회실에 앉아 아무리 봐도 이해되지 않는 자본론을 읽었다. 엄마의 전화를 대충 얼버무리며 끊었다. 과 행사에 말없이 불참했다. OT에 그를 데려갔던 친구는 용준에게 빨간 물이 제대로 들었다며 혀를 찼다. 친구는 어느새 마케팅 학회에 들어가서 프로모션 공모전을 준비한다고 했다. 승희는 어김없이 학회실에 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귀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래서인지 용준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3월을 넘어 4월이 끝나가고 머잖아 지구가 사라지는데도 용준은 시간을 가늠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가 언제까지고 짧았기 때문이었다.
 
‘소영웅주의를 배격하라’는 고딕체 문구 아래엔 ‘이 시대 대학가에 운동, 혁명이 가지는 의미’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승희는 한 줌의 청중 앞에서 몸짓까지 섞어가며 설명에 열을 올렸다. J는 곁에 놓인 교탁에 기대어 서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용준의 눈은 슬라이드가 아닌 승희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짧은 머리칼과, 그녀가 걸친 흰 남방을 스크린 삼아 새겨진 ‘사회학과 09학번 박승희’에 머물렀다. 대학생, 시간 강사, 청소 노동자들의 사진이 그녀의 평평한 가슴팍을 스쳐 지나갔다. 사진 속 사람들은 저마다 피켓을 들고 절박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인권, 노동권, 기본권, 이런권, 저런권, 모두 어떤 ‘권’이었다. 그들은 권리를 외쳤고, 용준은 그들의 아우성 너머로 승희의 가슴팍을 훔쳐봤다. 머리칼에 가려진 귓불을 훔쳐봤다. 그들과 비슷한 모양으로 벌어진 입술을, 그 안에서 정신없이 꿈틀대는 혀를 훔쳐봤다.
 
여기 오신 여러분들은 장차 뜨거운 혁명의 주체가 될 것입니다. 승희가 말했다. 안 될 수도 있지 뭐. J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여러분은 동시에 한없이 차가워져야 합니다. 승희가 말했다. 이 말은 맞지. 냉정을 잊어선 안 돼요. J가 끼어들었다. 승희가 J를 흘겨봤다. 거리에 나서게 되면 여러분은 아마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힐지도 모릅니다. 마치 혁명이 완성된 것처럼 말이에요. 여러분이 뭔가를 해냈다거나 되었다는 쾌감의 순간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승희가 말했다. 이것도 맞아요. 저도 예전에 그랬었죠. J가 끼어들었다. 저 새끼 존나 깝친다, 그치. 친구가 용준에게 속삭였다. 야, 용준아, 근데 여기 뭐 자본주의 어쩌구 하더니만 존나 운동권 같은 덴가 봐, 난 무슨 마케팅학횐 줄 알았지.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런 소영웅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도취된 순간에도 재벌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으며, 청년들은 제도권에 잡아먹혀 말라 죽어가고 있어요. 그래요. 사실 바뀌는 건 없어요. 집회가 끝나도 혁명은,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아요. 승희가 말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은 반드시 올 겁니다. J가 끼어들었다.
 
혁명을 믿나요? 승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용준의 친구에게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가 대답했다. 그러면, 언젠가 거리에 꼭 나서 보세요. 그리고 대열에 빠져 보세요. 소리도 질러보고 경찰이랑 몸싸움도 벌여 보세요. 잠시나마 작은 영웅이 되어 보세요. 승희가 말했다. 좆까는 소리하고 있다, 그치. 친구가 용준에게 속삭였다. 용준은 그녀를 멀거니 쳐다봤다. 소행성이 떨어질 거란 뉴스처럼 아득하기만 한 그녀의 말을, 믿고 싶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강의실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내내 현실감각도 없고 사회에 적응도 못 하고 사는 한심한 인간들이라며 그들을 욕했다. 용준은 다음날 입회신청을 했다. 친구는 용준에게 미쳤냐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고, 용준은 애써 못들은 척했다. 그는 그렇게 현실 부적응자가 되었다.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가 현실 부적응자와 공산주의자가 되어 한 일이라곤 학회실에 앉아 책을 읽으며 언젠가 들를 승희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새벽 세 시가 되자 내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하나 둘 자리를 떴다. 호프집엔 용준과, J와, 승희만 남았다. 승희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 있었다. J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다가 균형을 못 잡고 휘청거렸다.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용준은 비교적 멀쩡했다. 시계 초침이 약간 흐릿하게 정도였다.
 
야, 용준아. J가 용준을 불렀다.
네 선배. 그가 대답했다.
쟤, 예전에 진짜 날라 댕겼다. 네 선배. 한 손에 깃발 하나 딱 들고, 나머지 손으로 메가폰 딱 잡고, 대열 앞에서 연설도 딱 하고 말이야. 진짜 멋있었다, 알겠냐?
네 선배.
진짜 씨발 존나 멋있었다니깐?
네 선배.
그런 애가 소설을 쓴다는 게 진짜 멋있는 거 아니겠냐? 나도 읽어 본 적은 없는데,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나중에 조세희 급은 되지 않겠냐. 응? 노동 문학. 뭐 그런 거 있잖아. 너 조세희 난쏘공 읽어 봤지?
교과서에 있는 거 본 적 있어요.
그래? 이 새끼는 공부를 헛으로 했네. 꼭 읽어 봐 인마. 운동하는 사람이면 그런 건 필수야. 시간 날 때 미리미리 읽어 둬. 아무튼, 야당 같은 데서 승희 쟤 데려 갈라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아냐?
아뇨.
근데 있잖아, 쟤는 의회주의도 현실에 굴복하는 거라고 딱 버티더라. 안 갔지. 나는 진짜 쟤가 손가락이라도 자르는 줄 알았다니깐?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 해 줄게. 하여튼 진짜 존나 멋있었다. 니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네 선배.
그런 애가 소설을 쓴다는 게 진짜 멋있는 거 아니겠냐?
…….
용준아.
네 선배.
그런 애가 소설을 쓴다는 게 진짜 멋있는 거 아니겠냐?
…….
저런 사람이 있어서 아직도 세상은 바뀔 수 있는 거다. 알겠냐?
네 선배.
나 먼저 간다.
네 선배.
쟤도 깨워서 집에 보내고.
네 선배.
쟤 술 취해서 자다가 깨면 존나 골 때리니깐 그냥 지금 바로 집에 보내고.
네 선배.
내일 보자.
네 선배.
도망가면 안 된다.
네 선배.
다 뒤지는 한이 있어도.
네 선배.
 
J가 나갔다. 용준은 자리에 앉아 그가 계산을 마치고 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구겨진 지폐를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냈다. 총무가 카드를 들고 고향으로 내려간 탓이었다. J가 가게를 빠져 나가는 동안에도 승희는 고른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다. 용준은 승희를 보다가, 카운터를 보다가, 시계를 보다가, 달력을 보다가 했다. 보다가 보다가 보다가 보다가 하니 세 시 삼십 분이 되었다. 정적이 덩어리째 흘러버렸다. 안주인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거렸고, 달력을 비롯한 호프집 내부의 모든 것들은 미동조차 없었다. 보이지 않는 초침 소리를 따라, 승희의 등이 느리게 오르내렸다. 이 초에 한 번씩 솟았고, 이 초에 한 번씩 꺼졌다. 솟았다가 꺼졌다가를 계속하다보면 언젠가 5월 2일이 되어 소행성이 떨어질 거고 그들은 불구덩이에 휩싸일 거고 삽시간에 희뿌연 재로 변해 우주를 떠다닐 것이었다. 하지만 용준의 기분은 이미 하늘을 떠다녔다.
 
승희 선배.
…….
세 시 반이래요.
…….
집에 가야죠.
…….
좀 있으면 여기도 문 닫아요.
…….
선배 어디 살아요?
…….
선배.
…….
누나.
…….
박승희.
…….
#단락3 – 승희와 용준
 
J 선배가 승희 선배더러 조세희처럼 될 거래요. 난쏘공 같은 거. 용준이 말했다. 승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몸을 떨었다. 등줄기에 자잘한 요철이 돋아 올랐다. 그는 혁명적인 감각으로 전위적인 몸짓을 했다. 그들이 술 냄새를 섞었다. 서로의 미끈한 타액이 섞인 술 냄새는 여전히 술 냄새였다. 향기도 아니고, 악취도 아닌, 그저 똑같은, 술 냄새였다. 용준은 누나도 아니고, 승희야도 아닌 승희 선배 위로 고꾸라졌다. 납작한 젖무덤에 머리를 기댔다. 눈앞에 자그마하게 도드라진 젖꼭지가 보였다. 4월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고작 하루뿐인 5월의 젖꼭지 같았다.
 
그 새낀 혁명병 말기야. 승희가 벌거벗고 누운 채로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용준의 방 천장에, 청백색 날숨이 얇게 펴 발렸다. 매캐한 공기가 그의 방에 어떤 신비감을 더했다. 혁명병이요? 그게 뭔데요? 벌거벗은 용준이 물었다. 혁명이 없으면 죽는 병. J 선배가요? 응. 그럼 승희 선배는요? 난 아냐. 그러면 승희 선배가 그때 OT때 우리더러 혁명의 주체 어쩌구 뭐 그랬던 건 뭐예요? 그땐 혁명병이었지.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아 몰라, 씨발. 그녀가 담배를 빨아당겼다. 용준이 그녀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굴렸다. 근데 너 처음이야? 그녀가 다시 연기를 뱉으며 물었다. 고개를 그 쪽으로 향하고 말하느라, 연기가 그의 얼굴로 향했다. 네. 용준이 눈을 감고, 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축하해, 너도 이제 혁명병에 걸릴 거야. 제가요?
 
응, J도 너처럼 이렇게 걸린 거거든.
 
나 돈 좀 빌려 줄래? 라고 그녀가 물었을 때, 그는 성기를 성기에서 꺼내 두 번째로 사정하고 있었다. 아침과 새벽의 사이 즈음이었다. 그가 그녀의 뱃전에 날숨을 토해냈다. 단내와 술 냄새가 섞여 있었다. 돈이요? 응, 없어? 아녜요, 있어요. 많지는 않은데, 있어요. 그녀가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반지하방의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이 담배연기 색이었다. 무리하진 마. 그녀가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침침한 여명 속에서 빨갛고 뜨거운 불빛이 뻐끔거렸다. 혁명의 색이라기 보단 식었다 불붙기를 반복하는 욕정의 색이었다. 용준이 엉금엉금 기어 책상으로 갔다. 불알이 덜렁거렸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랍을 열고 뭉칫돈을 꺼냈다. 다음 달 방세긴 한데요, 그래서 엄마한테 미리 받은 거긴 한데요, 상관없어요. 뭔 현금을 이렇게 다발로 갖고 있어? 집주인이 할머니라서 계좌이체를 잘 못 한대요. 이거 나 받아도 돼? 네, 어차피 다 죽는다면서요. 아 맞네. 고맙다. 그녀가 페트병에 꽁초를 밀어 넣었다. 칙, 하고 불이 사그라들었다.
 
그들은 또다시 잠들었고 여명이 햇빛으로 바뀌었을 즈음, 승희는 깨어나 옷을 입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선잠에서 깬 용준의 성기는 어느새 또 발기해 있었다. 하지만 욕정보다 진한 피로가 몰려왔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봤다. 일곱 시 반 이었다. 열 시 반부터 수업이 있었고, 세 시부턴 학회실에 가야 했다. 플래카드를 마저 만들어야 했다. 내일은 노동절 전야제를 하는 날이었고, 모레는 노동절이었고, 모레는 5월 2일이었다. 용준은 고민했다. 승희는 어느새 현관 앞에 앉아 신발까지 신고 있었다. 용준이 선배, 하고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신발코를 현관 바닥에 통통 에 두드리며 왜, 하고 대답했다. 나 선배가 쓰는 소설 보고 싶은데.
 
나 소설 안 써.
 
어, 진짜요? 용준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 안 써. 안 쓴지 좀 됐어. 그럼 써둔 것도 없어요? 어, 없어. 쓴 것도 없고 쓰지도 않을 거야. 어차피 지구도 망한다며. 그럼 더 안 써. 선배 그럼 제가 빌려드린 돈은요? 그건 쓸 거예요? 응, 그건 써야지. 그건 지구가 망해도 써야지. 철컥 하고 문이 열렸다. 쾅 하고 다시 닫혔다. 그녀가 나가고 없었다.
 
용준은 현관을 멀거니 바라봤다. 시계를, TV 화면을 보듯, 멍하니 쳐다만 봤다. 무엇인가 보이는 듯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다시 보이는 듯했다. 뉴스였다. 대통령 담화였다. 어제 같은 오늘을 보내라는 말이었다. 소설을 쓰지 않는 승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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